조국 교수(법학전문대학원)

법의 이념 중의 하나가 ‘정의’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근래 큰 흥행을 거둔 영화 「내부자들」(2015)의 주인공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는 반문하지 않았던가.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는가?” 법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 이런 야유를 단호히 반박할 자신이 없다. 1988년 상습절도범 지강헌은 500만원 절도를 범한 자신이 70억 원 횡령을 범한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보다 더 중한 형을 선고 받자 탈옥했고 이후 인질극을 벌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유언으로 남기고 사살됐다. 범죄인이 만든 이 경구(警句)는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회자되고 있을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윤과 효율이 중요한 미덕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정의의 내용인 양 숭배되고 있다. 공정과 형평은 또 다른 ‘달달한 것’ 취급을 받는다. 이 속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그리스 철학자 트라시마코스의 말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는 교육부 고위간부의 발언은 이들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1987년 헌법체제가 수립된 이후 대의민주주의는 안착되었지만,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은 어렵다. 1997년 도래한 ‘IMF 위기’는 한국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위기의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과 재벌의 방만한 부실경영이었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평생 열심히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 몫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직장에서 해고됐고, 집이 날아가고 가정이 무너졌다. 횡령, 배임, 탈세 등 중대한 기업범죄를 범한 재벌 총수에게는 ‘3·5 정찰제 판결’(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내려졌을 뿐이다.

‘IMF 체제’가 종료된 지 오래지만 ‘신자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민주정부’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재벌공화국’은 공고화됐다. 투표권은 쟁취됐으나, 노동권과 복지권은 무너졌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의 이름하에 신분제가 작동하는 나라가 됐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지 30년이 지나자 소수의 ‘사회귀족’이 절대 다수의 ‘사회노예’ 위에 군림하는 나라가 눈앞에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현재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민주공화국의 제도적 기둥 한 축이 무너졌음을 막장 드라마 방식으로 보여줬다.

한편 사회경제적 약자 중에서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은 이중, 삼중의 편견과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의 꿈과 특성을 무시한 다수결은 ‘다수의 전제(專制)’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반도의 휴전선 북쪽의 ‘병영국가’에서는 자본주의적 기준의 인권은 물론 사회주의적 기준의 인권도 실종됐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야만’이라고 불리어야 마땅한 범죄가 국가나 권력 집단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를 ‘법허무주의’로 몰고 간다. 게다가 정의를 배신하고 법률기술을 팔아먹는 ‘법비’(法匪)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요약·인용해 유명해진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말,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분노할지언정 낙망해선 안 된다. 지식기술자가 아니라 지성인 또는 지식인인 사람은 ‘시대와의 불화’(루카치)를 창출하거나 감수하는 사람이다. 그 ‘운명’을 사랑하며—amor fati—고민하고 표현하고 걷고 뛰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별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서 있을 것이다.

11월 12일 전국에 켜진 백만 촛불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앞에 정의의 여신 디케는 현현(顯現)함을 확인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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