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간의 윤리성이 의심되는 사건이 연속이다. 비선 실세 국정농단에 국민은 충격과 슬픔에 눈물 젖은 밥을 먹고 만원 버스를 타야 하며 연예인 성매매 고백과 반성 기사를 읽으며 힘든 몸을 이끌고 귀가한다. 현실판 ‘막장드라마’는 웃기기는 커녕 국민을 사무치게 불안하고 외롭게만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KKK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여성 및 외국인을 비하하는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의 전형이다. 그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저급 리얼리티쇼에서나 볼 법 하지만 그는 결국 당선됐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탈냉전 후 생존한 신자유주의 속 우리는 소비시장에 살고 있다. 모두 돈 중심으로 움직이며 소비를 통해서만 인간다움을 찾는다. ‘감수성을 울리는 음악’을 찾아 듣거나 교외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베스트셀러를 읽어야만 ‘힐링’이 된다. 하지만 이는 욕망을 사는 소비 행위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속 인간은 욕망 소비자로 최적화되고 이 현상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2008년 아이폰이 개발된 후 아이폰7과 갤럭시노트7까지 애플과 삼성은 쉼없이 달려왔고, 이는 계속될 것이다. SNS의 등장은 사람 간 의사소통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지만, 과연 우리가 더 행복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아침부터 준비하고 기다리던 설렘은 이제 느낄 수 없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인간 공약 준수는 퇴색됐다. 약속을 깨는 다양한 사정이 스마트폰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단일 예에 불과하다. 소비와 생산의 주체로서 두 인간 활동이 균형을 맞출 수 있던 20세기와는 달리 21세기는 인간이 ‘소비자’이기만을 바란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변화가 인간에 가하는 폭력은 적지 않다. ‘쓰고 즐기고 버리고’의 반복은 인간의 사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으며 동일한 논리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고 작동시키는 소비의 원리가 발현되고 있다.

대학시절 본 것은 학교가 글로벌 경영·경제, 반도체 시스템 공학과 등을 쪼개며 돈 되는 학과를 신설하고 그에 투자하며 성장하는 비참함 말로뿐이었다. 기업의 대학 관여 구조에 학교는 학생들의 꿈과 희망을 위한 교육의 장이길 포기한 채 기업의 구미에 맞는 취준생을 육성한다. 동일한 스펙과 자소서로 유사 기업에 가려는 학생들에게 취업문은 좁을 수 밖에 없고, 기업은 취준생 하나를 제거해도 또 하나가 무수히 제공돼 죄책감 없이 철저한 ‘갑’ 노릇을 할 수 있다. ‘취업률 1위’ 뒤에 가린 ‘대학원 진학률 꼴등’의 성적표에 대한 참담함은 모두 학생들의 몫이라는 게 비통할 따름이었다. 한 해만 취준생이 모두 합의해 대기업을 지원하지 않으면 이 구조는 깨질 것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 시대의 무한이기주의 때문에 실패할 것이라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최근 시국 선언은 필자의 대학시절에는 없던 광경임에 긍정적이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당시에도 좁았던 취업문은 누구를 밟아야만 들어간다는 생각에 스펙 쌓기, 자소서 퇴고 말고는 무의미 했기 때문에 집단적 움직임은 필요조차 없었다. 이번에 ‘어디선가 말 타고 있을 너’로 인해 ‘1 대 다수의 불평등’이 인지는 됐다. 하지만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다수 대 다수의 불평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빈곤 학생들은 여전히 관심 밖이다. 이들의 권리와 행복을 위한 집회나 농성은 없었고 향후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근대에 적실한 인간상은 무엇인가. 물욕, 소비욕도 인간의 욕구 중 하나이기에 윤택한 삶과 ‘가진 자’의 정체성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일들은 ‘무의미한 인간다움’이 21세기의 캐치프레이즈는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사회화로 얻었다 보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인간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미국의 시민들은 혹시 있을 참사에 대비해 대선 전 트럼프의 낙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왔다. 하지만 당선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인들에게 자기 성찰에 대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미국이 추구하는 인간다움의 원천과 발현을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 또한 현재 국가 위기 상황에서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지우는 식의 소비적인 접근을 넘어 보다 근본적이고 생산적인 인간다움 및 한국인다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의 시발을 개인 내재적 속성 변화에서 찾았으면 한다.

김봉주
외교학과 석사과정·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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