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욱
정치외교학부 석사졸업

관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날도 눈이 내렸다.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인지,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인 관악은 영화 속의 근사한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은 선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있을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많이 먹게 되지는 않을지, 어서 동기, 선배들과 친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와 같은 ‘새내기스러운’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그날의 내게 관악은, 가족들을 떠나 혼자 시작할 서울에서의 삶과 대학 생활에 대한 묘한 낯섦은 물론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관악에는 또다시 겨울이 왔지만 추워질 날씨 걱정과 미끄러울 빙판길에 대한 우려가 먼저 드는 이제는 낭만이 주는 설렘보다도 현실이 주는 팍팍함에 익숙해져 버린 후다. 어느샌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돼버린 관악에서 12개 학기를 내리 머무는 사이, 학교에도 내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국립대학’ 서울대에 입학한 나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를 졸업하게 됐지만 교정을 떠나지 않았고 다시 새내기가 됐다가 또 한 번의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학교에 남겠다고 결정했던 첫 번째 졸업 때와는 다르게, 이번 겨울은 괜스레 마음이 헛헛한 걸 보니 교문을 나서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가 보다.

관악에서의 생활은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극의 연속이었고 더디지만 꾸준한 성장의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석사과정에 입학한 후로는 끊임없는 회의감과 자괴감이 나를 괴롭혀왔다. 수업 준비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익숙해져만 가고, 세미나 시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는 모습에 ‘과연 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힘 빠지는 질문과 종종 마주해야 했다. 학문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취업과 취직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공부와 연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고민 역시 끊임없이 들었던 나날들이었다. 또 현실 정치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정치학도로서 느끼는 무력감은 ‘내가 이러려고 정치학을 공부했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버겁기만 한 대학원 생활인 줄 알았건만 어느덧 검은 양장의 제법 두꺼운 석사논문 하나가 내 손에 들려 있다. 얼마나 잘 쓴 글인지에 대한 평가는 미뤄두더라도, 이 한 줌의 글은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성원을 먹고 자랐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힘이 돼줬던 고향의 가족들과 친구들, 논문에 대한 가차 없는 지도편달과 진심 어린 조언을 아낌없이 주셨던 여러 교수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학원 생활 속에서도 고민을 함께 나누며 기꺼이 술잔을 기울여줬던 많은 선배님, 동기, 후배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학교 밖은 위험하다. 정국은 불확실성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고, 경제는 얼어붙었다. 취업은 힘들고, 먹고사는 걱정은 숨막히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모진 세파(世波)를 오롯이 한 몸으로 맞아내야 한다. 때로는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기도 하고 민낯의 세상과 마주하며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캠퍼스 곳곳에 떠오르는 어렴풋한 추억들, 관악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그럴 때마다 내게 길잡이가 돼주기도, 용기와 격려를 건네주기도 할 것이다. 비록 처음 관악에 입성하던 그날의 가슴 떨림과 희망찬 기대는 없어도 편안한 익숙함이 있고, 익숙함이 지루할 때쯤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같은 시절을 지내고, 같은 순간을 공유하며 함께 울고 웃었던 사람들이 있다. 관악에서의 6년은 언제고 꺼내볼 수 있고, 삶 저기 어딘가에 한 자락으로 남겨둬도 진정 변하지 않을 더없이 아름다운 시절들로 기억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관악에는 부푼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새내기들의 기분 좋은 설렘과 들뜸이 봄을 알려올 것이고 나는 또 다른 ‘관악’에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새내기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한 계절의 끝에 다음 계절이 기다리는 것과 같이, 그리고 ‘commencement’라는 단어가 ‘졸업’과 ‘시작’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관악과 내가 만들어갈 각자의 이야기는 다시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수년전 이 계절에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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