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히 얽힌 사람들, 유정하게 사랑으로 풀어내다
무정히 얽힌 사람들, 유정하게 사랑으로 풀어내다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7.02.26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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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무정』 100주년 기념

1917년 새해 매일신보 1면에 새로운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이광수의 『무정』으로 1917년 6월 14일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정』은 한국근대장편소설의 효시, 구어체 문장의 개척자, 계몽기 신문학의 집합체 등 현재까지도 수많은 이름으로 논의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무정』 전에도 신문을 통한 연재소설의 보급은 꾸준히 있었지만 『무정』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작품은 없었다.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를 『무정』이 “서양이나 일본의 원본이 없는, 우리 작가의 독창적인 ‘원본’이자 ‘순수한’ 창작물로서의 장편 소설”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정』이 연재되기 전은 「장한몽」 「해왕성」으로 대표되는 번안소설의 시대였다. 이광수의『무정』은 외래 문학이 아닌 우리의 순수한 근대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를 본격적으로 충족시켜줬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그 동안 『무정』은 근대성, 계몽성 등의 한정된 주제 위주로만 논의가 이뤄져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삼각관계의 연애 이야기로 당시 사회의 연애관의 변화나 새로운 여성상의 등장을 녹여낸 작품이다. 『무정』 100주년을 맞아 계몽소설이라는 기존의 통념에서 탈피해 풍속소설이자 연애소설로서 『무정』이 사회를 어떻게 녹여내고 변화시켰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자유라는 날개를 단 연애

『무정』은 당대 최고의 인기소설이었다. 독자들이 영채를 죽이지 말라며 매일신보에 연일 투서를 보냈다는 이야기나 유생들이 『무정』이 풍속을 해친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것에서 당대 무정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김종욱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들은 대부분 이광수의 명성이 훨씬 높아진 뒤에 회고담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이라며 “실제로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엄정한 검증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정』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가족 전체가 매일신보를 기다릴 정도로 『무정』이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무정』에 그려진 주인공들의 사랑은 당시 조금씩 싹트고 있던 자유연애사상과 맞물려 『무정』이 청년들에게 한층 더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연애’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무정』이 연재되기 전인 191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러나 외국에만 있던 언어의 의미를 번역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였던 만큼 대중이 이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무정』은 이러한 연애를, 특히 자유연애를 대중들이 자유로이 사용하는 기반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무정』이 연재되던 시기는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등장하고, 젊은 남녀들 사이의 자유로운 연애가 발생한 시기였다. 황종연 교수(동국대 국어국문학과)는 “그 동안은 남녀 간의 사랑이 신분제적 제약에 의해 타의로 결정되는 관계였다”며 자유연애사상이 보급된 이후로 “남녀 각자가 자주적으로 배우자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정』 속 주인공인 형식은 선형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선형은 이 질문에 큰 충격을 받는다. 황 교수는 이를 “그 동안 결혼이 사랑하는 감정의 유무와 상관없이 배우자가 결정되는 결합이었다면 형식의 질문은 다른 결합의 모습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광수는 일본 유학을 통해 자유연애사상을 알고 있었고, 『무정』을 통해 이를 전파했다.

그러나 완벽한 자유연애와 신여성상이 작품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여성인 선형은 능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사고하지 못하고, 대체로 부모의 말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형이 진정한 자유연애를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랑하지 않는 형식과 약혼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 교수는 『무정』에 담긴 자유연애사상의 불완전함을 지적하며 “성숙한 남녀 간의 자유연애보다 부모의 간섭에 의한 강제적인 결혼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가 더 부각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정』 속 인물들이 미숙하게나마 구세대로부터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뚜렷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병욱은 진정한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형식 역시 꿈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능동적인 청년상을 보여준다.

현실 속 인간의 내면을 그리다

사실 연애와 사랑에 관한 소설은 『무정』 이전에도 있었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고전소설부터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 연애를 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개화기 소설 「혈의 누」까지, 사랑을 주제로 하며 ‘연애’라는 용어를 사용한 작품은 많았다. 김 교수는『무정』과 기존 연애소설의 차이점에 대해 “근대적인 의미의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남녀 간의 만남이 아니라 성숙한 내면을 가진 주체로서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며 “『무정』에 이르기 전까지의 소설들은 그런 성숙한 내면을 가진 인물을 그리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방 교수는 “사랑의 갈등과 감정의 갈등이 훨씬 더 내밀하고도 풍성하게 묘사된 것이 『무정』과 그 이전 소설의 큰 차이”라고 덧붙였다.

『무정』은 주인공인 형식부터 영채, 선형까지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독자들이 그들의 사랑과 갈등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방 교수는 “이광수는 톨스토이를 존경했다고 하지만 정작 작품을 읽어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인물과 같은 내면성이 드러난다”고 말하며 어떤 인물이 등장할 때 충분히 내면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무정』의 묘사력을 높이 평했다. 『무정』이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문체를 가진 톨스토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인물의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구사하는 도스토옙스키적 특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소설은 신의와 의리만을 강조하는 평면적인 인물들을 내세우고 그들이 결국에는 사랑을 지켜낸다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무정』은 인물의 내면을 다채롭게 묘사해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상세하게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형식이 영채를 버리고 선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무정』은 이러한 인물의 내면묘사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던 사회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더욱 극대화했다. 방 교수는 『무정』이 “1910년대 서울의 도시 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풍속 자료”라고 언급했다. 사람들이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 종로, 안국동, 경성학교 등 소설 속의 공간을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과 비교할 수 있도록 현실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이외에도 『무정』은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짓누르고 신세대가 구세대를 대체하며, 지식계급이 지식이 없는 계급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묘사했다. 인물 각각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사회를 현실적으로 그리면서 『무정』은 대중의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계단을 올라 마주한 누이

『무정』 속 인물들은 구세대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신세대다. 형식, 선형, 영채는 당시 사회모습을 반영해 나타난 인물이었다. 『무정』에서 영채가 친오빠가 아님에도 형식을 오빠라고 부르는 모습은 오빠라는 용어의 의미 변화를 보여준다.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만 사용되던 오빠는 동지애적 대상으로서의 오빠, 그리고 연애 대상으로서의 오빠까지 그 의미가 확장됐다. 근대적인 신식교육을 받은 오빠는 자신이 구세대의 대표자인 아버지의 소유물인지를 고민한다. 이 고민에 대해 오빠는 ‘부자(父子)의 마음은 동심일치(同心一致)하지 않으니’ 자신은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오빠를 아버지의 소유물에서 벗어난, 자주성을 가진 ‘청년’으로 재탄생시킨다.

신세대인 오빠가 부상하고 구세대의 대표격인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따르던 누이는 오빠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누이 또한 신식교육을 통해 신여성으로서 신세대에 동참하면서 오빠와 동등한 주체로 서게 된다. 이는 1910년대 후반의 유학생 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방 교수는 이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남녀관계의 표상으로서 오빠의 탄생을 언급하며 “서로 오누이적 동반자로서 순수한 의식과 함께 세계를 구하자는 정신주의적 유대를 지향하는 흐름이 유학생 사회에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유학생의 풍속은 당시 유학생이었던 이광수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이는 『무정』에도 드러난다. 하지만 국가를 구하는 길, 세계를 구원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순수한 의식이 이성애적 남녀관계로 더럽혀지지 않아야 했다. 김 교수는 “이광수는 『무정』에서 남녀관계를 오누이관계로 자주 치환시키고 있다”며 “욕망이 개입하지 않는 순결한 관계로 의미화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유학생 사회의 순결주의, 청교도적 사명감에 입각한 연대의식이 남녀관계를 순수한 오누이 관계로 만든 것이다. 『무정』에서는 여성인물이 친오빠가 아님에도 남성인물을 오빠라고 부르며, 이는 동등한 주체로 서로를 인정하는 발판이 된다. 이 인식은 소설의 말미에서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연대의식으로 나아간다. 수해를 입은 수해민들을 위해 힘을 합쳐 공부해서 조선을 구하자는 형식의 결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는 오누이의 관계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서 끝나지만, 사회에서 오누이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발전을 계속한다. 황 교수는 “1920년대에 여성운동,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공동의 이념을 매개체로 남녀가 평등해지는 상태가 나타났다”며 “그때부터 여성들이 동지에 해당하는 남자와 연애의 대상이 되는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다”고 오빠-누이 관계의 발전을 설명했다. 전통적인 신분과 가족구조에서 벗어난 오빠와 누이는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하며, 이들 사이에 이성감정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순결주의와 연대의식은 여성을 순수하게 누이로서 바라보자는 마음과 연애감정을 가진 이성으로서 바라보자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초래했다.

『무정』은 불완전하지만 보다 자유로운 연애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유연애의 행복한 모습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무정』은 사랑을 실현하는 데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 이로 인한 갈등을 깊이 있게 나타낸다. ‘진정으로 영혼과 영혼이 마주 합하였는가?’에 대한 답을 사랑으로 정의하던 형식은 성공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외면하며, 독자들은 냉혹한 현실에 의해 형식의 선택이 지배받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공감했다. 방 교수는 『무정』이 통념화된 선입견에 의해 이해돼왔다며 “『무정』을 새롭게 독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공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무정’한 사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과거의 읽을 법한 작품 정도가 아닌, 현재까지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무정』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삽화 위: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삽화 아래: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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