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총문학연구회’ - 홍미르(기계공학과 15)

나는 풀리지 않는 비선형식을 전개하고 있다. 임의로 근을 상정한 뒤 그것을 식으로 환원시키는 비연역적인 풀이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가. 글을 이해(Interpret)하는 게 곧 풀어내는(Interpret) 것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텍스트를 ‘읽는’ 행위와 방정식을 ‘푸는’ 기술을 구별할 수 없다. 글의 의미와 그 속에 결합된 인과관계를 분해해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을 우리가 정의하는 이해의 메커니즘이라 한다면, 불가해한 문제를 이해 가능한 부분으로 분해해 원하는 해(解)를 얻어내는 과정이 이해의 작동 방식과 상당 부분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미 분리된 채 독자 앞에 던져지는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문장과 문장, 행과 행 사이를 연결하는 인과관계를 하나씩 뜯어낼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안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경주의『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황병승의『여장남자 시코쿠』가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한국 시단에서는 인과성의 틀을 벗어난 비선형시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음은 이제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 됐다. 하나의 작품에서 단 하나의 인과율만을 추출해 이에 따라 단계통의(Monophyletic) 해석을 내놓던 시대가 끝을 고하고 다수의 해석이 난립하는 전국(戰國)시대가 막을 올린 이 상황은, 김춘수와 황지우 대(代)에 이르러 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폭로됐을 때 이미 예견된 운명이었다.

문제는 중등교육에서 시 장르를 접하기 시작했던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런 과도기를 처음 인식했을 때 진통을 겪는다는 점이다. 최근의 시에서 각각의 장면을 잇는 인과적 사슬이 부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장면은 느슨하게 걸쳐있고, 서로 간에 치환 가능한 형식을 가진다는 권혁웅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근대시의 독자들이 최초로 현대시를 마주했을 때 겪는 충격은 결국 의미단위가 아닌 형식단위에서 발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당(未堂)이나 이상(李箱)의 시처럼 인과율 속에서 고도의 상징체계를 발전시켰던 근대의 시들을 독해하며 익혀온 의미론적 통찰이 현대의 비선형시들 앞에서 무용해지는 순간, 독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체계 너머의 의미들을 떠올리며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허윤진이 지적한대로 시인들이 소비하는 하위문화적 요소들이 그 문화에 대한 공통감각이 없는 수용자에게 매우 낯설고 다른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어떤 요소의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고, “그 요소의 새로움이란 결국 진부한 일상성에 지나지 않으며, 새로움에 대한 미학적 가치 평가는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철저한 오인(誤認)이었음을 확인”*하게 됐을 때, 우리는 현대시를 맞닥뜨린 그 순간부터 해소되지 못했던 이해의 욕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해야 할 문화적 맥락은 무엇을 통해 학습될 수 있는가. 전술한 바에 따르면 현대시의 난해함은 결국 시가 단 하나의 의미나 목소리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현대시를 두고 다의성을 읽어낼 수도 있고 다성성을 논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의미론적 층위에서 충돌하는 의미들의 불협화음(Cacophony)과 서사적 층위에서 울리는 대위적 인간상의 다성악(Polyphony)이 하나의 텍스트에 공존하는 황병승의 시편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인과율을 부정하면서도 줄거리를 형성하는 기묘한 공존상태를 보여줬다. 하지만 불안정하게 중첩된 여러 목소리들이 낳았던 긴장은 결국 허무하게 사라지고, 이것은 “극적인 시를 소박한 인형극의 차원으로 추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추락을 하나의 미적 전위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황병승 시의 등장인물들이 이전 세대 시인들이 보여줬던 희곡적 인물들의 변형된 판본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전격적인 희곡 텍스트였던『오월의 신부』를 차치하고서라도, 황지우의 여러 시편들에서 황병승의 탄생을 예고하는 다양한 종류의 연극적 인물(Persona)들은 끊임없이 등장해왔다.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형사에게」의 김형사,「의혹을 향하여」의 조태일 시인, 인쇄공 김씨 할아버지” 등이 모두 극적인 인물에 가깝다는 허윤진의 분석은 타당해 보인다. 심지어 다른 인물의 등장을 배제한 채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한국 생명 보험 회사 송일환 씨 의 어느 날」의 송일환 역시, 인물이 아닌 대상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투사하는 일인다역의 복화술을 선보이고 있다.

 

1983년 4월 20일, 맑음, 18℃

―「한국 생명 보험 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 부분

 

작품의 첫 머리에서부터 독자는 18℃라는 기호를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타자화해 표출한 화자를 마주하게 된다. 이 온도는 기후를 나타내주는 객관적인 장치인 동시에 욕설을 완곡하게 표현함으로써 희화(戲畫)적 효과를 창출해온 구어사회의 관습과 맞닿아있다. 이런 유사한 시도는 황지우의 다른 시편들에서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벽1」에서 자진신고 기간의 시작일과 종료일 앞에 각각 사용된 “자”, “지”라는 글자가 그 예시이다.

 

예비군훈련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83.4.1-지:83.5.31

―「벽1」 전문

 

이 짧은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황지우 시의 극적 인물이란, 작중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뿐 아니라 화자의 객관화된 목소리를 내포한 사물들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이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 된 어떤 기표에 의탁함으로써 주관성을 띠지 않는 한 사회로 하여금 담담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힐난하게 한다. 때문에 신문에 적힌 온도나, 벽보에 적힌 문구는 화자와 같은 목소리를 낼지언정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극중 인물로 기능하면서 각각의 극적 페르소나들에게 독립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표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

준 청과물상 김정권(金正權)(46)

령=얼핏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조세형(趙世衡)같이 그릇된

셨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생

활 태도를 일찍부터 익혀 평

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이다. (이원주(李元柱)군에게) 아

임감이 있고 용기가 있으니

공부를 하면 반드시 성공.

―「한국 생명 보험 회사 송일환 씨 의 어느 날」 부분

 

잇따른 신문 기사들과 만평 등에서 이후 비선형시를 대표하게 될 몽타주 기법의 원형이 등장한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작중 화자이자 극적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파편적인 기사들은 서로의 인과관계가 거의 사라진 채 제시돼있다. 이 구절을 독해하면서 독자는 앞의 문장을 통해 뒤의 문장을 추론하는 연역적 분석 과정을 벗어나 각각의 문장들을 재조합한 뒤 시의 주제와 맞대어보는 비선형적인 시 읽기를 최초로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장면이 또 하나의 장면을 불러와 결국 시의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기존의 시 문법에서 벗어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시구들을 비선형적으로 늘어놓는 최근 시의 화법이 황지우의 초기 시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시문학을 향유하는 우리들이 구술연행적 전통에서부터 이어 받아온 선형적인 시 읽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이상 전통적인 이야기꾼의 청중으로서가 아닌, 회화를 감상하며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합적으로 듣는 시청자가 되도록 했던 황지우의 시는, 시 장르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학습하고 그 예를 시로써 확인하는 작업은 분절된 것으로 오해되는 근대시와 현대시 사이의 간극을 보간(Interpolate)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된다. 이제 비선형식은 선형으로 보간됐고, 우리는 현대시의 비선형성을 근대의 선형적 문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방정식의 해(解)를 우리에게 구해주지는 않았으니, 풀이의 끝맺음은 늘 우리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허윤진,「Culture Killed the Literature」

**허윤진, 「사막에서 익사하다」

 

홍미르(기계공학과·15)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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