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미 강사
사회학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촛불과 탄핵, 그리고 조기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역사를 써 가면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교과서에서 광장으로 불러냈다. 존 로크는 민주주의란 시민들의 계약으로 권력을 세우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로크는 덧붙인다. 만약 권력자가 시민과 맺은 계약을 위반한다면 시민들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그렇다. 대통령은 지배자가 아니라 국민의 대리인이며, 대리인이 국민의 뜻을 거역하면 리콜을 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토론할 요즈음 나는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생각난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질 나쁜 토양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우리는 구부러진 나무를 잘라내고 이를 민주주의를 위한 불쏘시개로 쓰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이 나무가 자라난 ‘토양’은 무엇인가? 정치적 무관심? 이 답변은 너무 부족하다. 민주적 제도가 잘 발달한 북유럽의 경우,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도 잘 설계된 시스템이 ‘대리인’의 사익 추구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들이 언제나 생업을 뒤로하고 대리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에서 촛불을 들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무인 커피 판매대 실험’을 보여주곤 한다. 무인 커피 판매대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뽑고 정해진 금액을 내는 실험이다. 여기서 핵심은 판매대에 ‘눈 그림’을 붙였을 경우와 아닐 경우 사람들의 반응이다. 사람들은 눈 그림이 없을 때보다 눈 그림이 있을 때 훨씬 더 자주 돈을 낸다. 즉 눈 그림이 환기시키는 ‘감시’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와 통한다. 이 반지를 끼면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과연 인간은 정의로운 행동을 할까? 플라톤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귀게스는 이 절대반지를 끼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 행동은 감시에 따라 달라짐을 알려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은 공무원을 감시하는 ‘의회 옴부즈만 제도’를 두고 있다. 옴부즈만은 한 사람이라도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신고하면 이를 철저히 조사하고 기소할 권리가 있다. 1,000만이 촛불을 들지 않아도 한 명의 국민만 눈을 뜨고 있어도 권력과 공무원의 부정을 감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적 토양에서 대리인이 늘 감시에 노출되므로, 쉽게 권력이라는 절대 반지를 끼고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

대리인들의 부정·부패, 즉 ‘구부러진 나무’가 한국의 고질병이 된 이유는 국민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다. 나쁜 토질인 취약한 감시제도 때문이다. 여기서 크고 작은 ‘최순실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란다. 이 ‘최순실들’을 없애는 일은 몇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최순실들’을 감옥에 보내오지 않았는가. 근본적 문제는 질 나쁜 토양이다. 그 토양은 우리의 문화도 ‘최순실화’ 시켜 왔다. 이 토양에서 조금만 힘이 있으면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갑질하는 문화, 공식 통로보다 인맥을 이용하는 문화, 사익을 위해 공적 자원을 동원하는 태도가 자란다. 서울대 구성원들은 이 토양에서 자주 절대반지의 유혹에 노출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절대반지에 집착하는 골룸이 된 건 아닌지 때때로 자문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것은, 작은 권력만 있어도 쉽게 절대반지를 낄 수 있는 이 나쁜 토양을 바꾸는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감시의 눈을 뜨고 있으면 절대반지를 낄 수 없는 그런 감시 제도. 지금 무엇보다 중한 건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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