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림 석사과정
협동과정 미술경영

돌이켜보면 학부 시절의 나는 괜스레 불안해했다. 처음 경험하는 자유로운 생활이 충분히 즐거웠고 내가 원하던 전공 공부를 하고 있었음에도 늘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스스로 꽤 일찍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찾고자 노력하고 나만의 길을 찾아 삶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면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어른으로서의 삶의 형태에 속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불안감은 해소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무사히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이후에도 내가 ‘맞게’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때때로 자문하게 됐다. ‘과연 내가 남들만큼 살 수 있을까? 나중이 돼서야 내가 한 선택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 어쩌지?’ 이런 질문들은 보다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공을 공부하는 대신 미술을 공부하고,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하는 대신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며 생긴 것들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내 나름의 답 역시 미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작가는 작품을 제작할 때 본인만의 감상이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꼭 감상자 역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상자는 꼭 그런 의미나 메시지를 따르지 않더라도 본인이 느끼는 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상자의 이런 감상 행위를 통한 뒤에야 완성이 되기도 한다. 즉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에, 작품을 감상하며 지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예를 들어 10명이 같은 작품을 본다면 10개의 해석이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의 다른 해석을 나눔으로써 오히려 하나의 해석만 있을 때보다 더욱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게 된다. 서로 간의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처음처럼 모두가 다르게 생각할 수도, 누군가가 의견을 바꿀 수도 있다. 이렇듯 다름을 인정하고 지향하는 태도는 내가 미술에 있어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인데, 이런 태도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의 다양한 삶의 모습에도 정답이나 오답이 있다고 재단하는 대신, 마치 미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 없는 것처럼 그저 다양한 삶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본인만의 개성,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 등을 바탕으로 누구와도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다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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