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대학신문』의 화두는 졸업과 정년이었다. 모두 여정의 완성과 새로운 출발의 지표이기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또 기존의 사회적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됨을 신호하기에 지극히 사회적이기도 하다. 한편 대학에게는 지금껏 품고 있던 자신의 일부를 이제 놓아준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졸업과 정년은 비슷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졸업은 파종을 앞둔 이들의 기대와 불안을, 반면 정년은 수확을 마무리하는 이들의 여유와 회포를 내포한다. 『대학신문』은 삽화와 만평, 특집 기사와 인터뷰를 통해 졸업과 정년을 둘러싼 이런 다양한 정서를 담아냈다. 특히 젊은이들이 씨를 뿌리기엔 너무도 척박한 토양에 대한 음울한 암시를 반영한 졸업특집그림과 수확을 거두고 품위 있게 나이 들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이들의 장래를 묘사한 인터뷰의 대비를 통해 한국 사회의 민낯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낸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졸업과 정년은 그 당사자에게 자신의 삶에서 대학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누군가에게 대학은 자유로운 학문을 탐구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실제를 변혁하기 위한 실천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 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 대학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누군가에게 대학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장이기도, 자아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정진하는 곳이기도 했을 터이다.

대학을 떠난 이들뿐만 아니라 대학에 남아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도 대학의 의미를 성찰해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졸업을 맞이한 선배들을 떠나보내며, 쌓여만 가는 과제에 치여 한숨을 내쉬다가, 시험을 망치고 절망에 휩싸인 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사한 봄날 교정을 거닐다가, 혼자 눈물 젖은 빵을 욱여넣다가, 차디찬 본부에 동지와 난로에만 의지한 채 오들오들 떨다가, 혹은 소주잔을 꺾다가 문득 대학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의문이 기척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소리 없이 온 손님은 흔적 없이 가버리는 바, 이런 모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기에 아름답고 의미 있으며 추억으로 남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를 담지한 이런 정서는 쉽게 날아가버린다. 안타깝게도 『대학신문』은 졸업과 정년을 맞이한 이들의 휘발해버린 이러한 정서를 포착해내지 못했다. 졸업과 정년이라는 사건을 현상으로서 기술하는 데 급급했는지 그 현상의 이면의 정서를 다루지 않았다. 그 정서가 대학의 의미, 대학의 역할에 대한 시의적절한 물음을 담고 있었기에 이는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대학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교육과 학술 연구의 전통적인 장으로서의 대학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시흥캠퍼스 사업을 둘러싼 학내 갈등이 상존하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역할에 대한 물음을 의제로 설정하고 공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더라면 보다 의미 있는 호가 되지 않았을까. 다행인 것은 앞으로 대학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다룰 기회가 또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때는 『대학신문』이 ‘위험의 순간에 번쩍이며 빛나는 기억을 포착’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재원
경영학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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