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425-1번지에 가면 도로 옆에 ‘한국전쟁 전후 진주 민간인학살 2차 발굴’이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경사진 흙길이 보인다. 흙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직사각형 형태의 조그마한 땅에 경계가 쳐있고, 그 안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이 묻은 채, 허리도 못 펴고 땅만 바라보는 이들이 절실하게 찾는 것은, 과거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끝나지 않은 학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 정부는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이와 관련 된 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켜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그러나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비롯해 이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람 등 많은 이들이 사소한 이유로 이 단체에 포함됐다. 심지어는 지역마다 보도연맹 인원 할당량을 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땅이나 식량 등의 보상으로 포섭해 가입시키기도 했다. 1949년 이들의 숫자는 30만 명에 달했으며, 전쟁 발발 후 이들 중 대다수가 공산주의자로 간주돼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근처에 위치한 진주시에서도 보도연맹을 대상으로 한 참혹한 학살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718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학살 이후에도 아픔은 계속됐다. 희생자의 남은 가족들은 ‘빨갱이’로 몰려 힘든 삶을 살았다. 발굴현장을 찾은 유족 노갑순 씨는 “5살 때 순경들이 집에 와 아버지께 파출소로 한번 오라해서 가셨는데 그대로 돌아가셨다”며 “그 당시 마을에서 잘 살기로 알아주던 집이었지만, 가장을 잃은 뒤에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힘들게 살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진주유족회 강병현 회장은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을 하거나 기업에 취직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며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강병현 회장은 “‘아버지가 빨갱이니까 너도 빨갱이’라는 조롱을 듣고 고향 친구를 심하게 팬 적이 있다”며 “그 말이 듣기 싫어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와 10년 동안 타지 생활을 했지만, ‘빨갱이 마누라’라며 손가락질 받을 어머니가 계속 생각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아픔은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과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전쟁 못지않게 쓰라렸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나라

이번 진주시 발굴을 포함해 현재 국가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처리하는 과정은 민간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법’이 통과돼 국가 차원의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작업으로 총 1,617구의 유해와 5,600여 점의 유품이 발견됐지만, 법이 한시적이었기 때문에 2010년 이들의 활동은 종료됐다. 이후 진화위는 이명박 정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과 안장을 위한 건의’를 통해 후속조치를 요구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유족회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발굴은 진주에서는 두 번째, 전국적으로는 네 번째 발굴이다.

국가 차원에서 민간인학살 문제와 관련해 진상규명과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진화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169개 지역 중 발굴이 이뤄진 곳은 13개에 불과하다. 강병현 회장은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가 모두 발굴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유해가 발굴됐는지 확신할 수 없다”며 국가의 신속한 후속조치를 요구했다. 박선주 발굴단장은 “국가가 나서서 발굴현장을 확대하고, 발굴된 곳은 교육현장으로 만들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국가정체성의 확립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신장을 위해서라도 발굴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대전유족회 김종현 회장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민단체에서 하고 있다”며 “부모들이 국가에 의해 비참하게 돌아가셨는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 비통해했다.

정부 차원의 대응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는 2020년까지 대전 산내동에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을 설립하고 유해를 안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강병현 회장은 “토지도 매입하지 않은 상태인데다, 약속에 그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다”고 밝혔다.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족은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은 바 있지만, 이 역시 유족들이 국가를 향해 낸 소송에서 승소해 얻어낸 것으로 정부에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현장에서 맞닥뜨린 끔찍한 그날

진주시 발굴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골은 비참했던 학살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가로 8미터, 세로 2미터의 땅에서 발견된 유골은 최소 27명의 것으로 추정된다. 박선주 발굴단장은 “유해를 덮은 흙의 높이가 30~50cm에 불과한 점으로 보아, 이들을 제대로 묻어주지 않고 대충 시체를 가리는 정도로 흙을 덮어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몰린 것에 대해 박 단장은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을 난사하면 살기 위해 자기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는 카빈탄두와 M1탄두가 발견됐다. 카빈탄두는 그 당시 남한의 경찰이, M1탄두는 국군이 사용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남한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을 입증한다. 또 현장에서는 45구경 권총의 탄두도 발견됐는데, 박 단장은 “45구경 권총의 경우는 사격거리가 1m 정도로 매우 짧아 멀리서 사람을 죽일 수 없고, 확인사살용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현장에서는 이들의 유품도 여럿 발견됐다. 다양한 형태의 단추가 나온 점으로 보아 이들은 보도연맹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무소의 재소자들이었다면 죄수복을 입어 발견되는 단추가 일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발견된 단추는 여름옷의 단추였으므로 사망 당시 계절은 여름으로 추정된다. 벨트나 안경 등의 일상적인 물건이 발견됐지만 신발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박 단장은 “희생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신발을 빼앗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더운 여름날 희생자들은 맨발로 땅을 밟고 쏟아지는 총알을 맞으며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학살당했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견됐다.

여러 종류의 단추와 벨트, 버클, 보철된 치아, 도수 없는 안경이 보인다.

발굴된 유해는 상태가 좋지 못해 바스라지고 으깨지는 경우가 많았다. 입자가 작은 생토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물이 잘 빠져나가지 못해 습기에 노출됐을 뿐 아니라, 토양 자체가 산성을 띠어 뼈가 보존되기에 최악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뼈들은 모두 부식됐고, 단단하고 큰 허벅지뼈, 종아리뼈, 팔뚝뼈와 소량의 두개골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또 뼈의 가장자리 부분의 부식이 심해 나뭇가지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개골 뼈 역시 흙에 깔려 부서져 당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제까지 발굴된 유해가 발굴 당시의 위치에 놓여있다. 관절이 모두 부식돼 나뭇가지와 유해의 구분이 어렵다.

잘못은 국가가, 수습은 시민이

현장을 지켜보니 발굴에 필요한 작업들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호미와 붓, 나무막대를 이용해서 땅을 파다보면 허리와 목이 뻐근하고 옷이 모두 흙 범벅이 되지만, 자원봉사자들 중 누구하나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쉬자는 말에 괜찮다며 계속해서 작업에 집중하던 한 봉사자는, 흙에 가려져 살짝 모습을 보인 유해를 가리키며 “이렇게 꺼내달라고 말하는데 쉴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너무 약해진 유해는 꺼내는 도중 부서지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온 유골을 지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발굴된 유해를 커다란 통에 넣고 아세톤을 가득 채우면, 몇 사람이 칫솔을 들고 뼈에 붙은 흙을 떼어내는 과정이 이어진다. 흙에 포함된 미생물 등이 뼈를 빠르게 부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아세톤은 수분을 없애고 흙을 제거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든다. 아세톤은 냄새가 독하고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나가던 봉사자들은 이 과정을 ‘본드하는 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날씨도 추웠지만, 작업을 하는 도중 아세톤이 기화하며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손이 시려 작업은 더욱 힘들었다.

박선주 단장을 비롯해 여러 봉사자들이 땅을 파며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현재 발굴하는 데 정부의 지원이 없어 열악한 상황이지만 전국 각지, 심지어 해외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공동조사단의 발굴은 4차까지 진행됐다. 안경호 현장총괄조사위원은 “이번 발굴에 100명 정도의 인원이 도움을 줬다”며 “매번 휴가를 내고 와서 작업을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도 있다”고 말했다. 진화위에서 활동했던 김윤경 씨는 “1학년 때부터 와서 도와준 영남대 학생들이 벌써 졸업을 앞두고 있다”며 시민들의 도움으로 이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독일에서 집단 학살에 대해 공부하다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강형민 씨는 “아픔의 역사와 희생자들의 사회적 고통에 비해 진상규명이 현저히 적다고 생각한다”며 “현재와 같은 활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더욱 확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차원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 유골 발굴은 시민들의 힘으로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진화위에서 정부의 지원 하에 2007~2009년 동안 약 1,600여 명의 유해를 발견한 반면, 현재 같은 기간 동안 민간단체인 공동조사단이 발견한 유해는 1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대규모 발굴을 위해 국가 차원의 지원은 필수적인 것이다. 강병현 회장은 “아버지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살해당했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어디 묻혔는지 듣지도 못했다”며 “유해를 찾는다면 아버지를 양지바른 곳에 묻고 싶다”고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을 이제서야, 간절하게 소망했다.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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