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탄생 100주년 기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명망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아름다운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댄스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카타리나는 체포돼 검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와 하룻밤을 보낸 남성은 악명 높은 은행 강도 루트비히 괴텐이었으며, 그 사실을 몰랐던 카타리나는 범죄자를 숨겨주고 도주를 도와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성실하게 살아가던 카타리나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되고 만다. 카타리나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파고 든 검찰은 그녀를 어떻게든 괴텐의 공범으로 몰고가려하고, 황색언론 『차이퉁』(독일어로 ‘신문’을 뜻한다)은 검찰과 은밀하게 협력하며 터무니없는 날조와 선정적인 기사로 카타리나를 ‘은행강도의 정부’이자 ‘빨갱이’로 몰아간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어려운 경제적 조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온 카타리나는 이제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크지는 않아도 자신의 전부를 의미하는 ‘명예’를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 그리고 파렴치한 언론의 폭력은 카타리나를 매개로 더 커다란 폭력을 낳게 된다.

이것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1917-1985)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일을 야기할 수 있는가』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나치의 야만적 통치와 유대인 대학살, 2차 세계대전의 경험 이후 뿌리까지 황폐해져버린 독일의 문학이 사회비판적 성찰과 참여, 문학적 실험 등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데 크게 기여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뛰어난 문학 작품 속에서 사회적 문제들을 늘 선명하고 간결하게 다룬 하인리히 뵐은 독일 국내외 독자들의 사랑을 등에 업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 발표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1951),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 『기차는 제 시간에 왔다』(1959), 『9시 반의 당구』(1959),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1963), 『여인과 군상』(1971) 등과 함께 하인리히 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독일의 대표적인 황색언론 『빌트』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뵐은 1972년 1월에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당시 주목받고 있던 극좌파 테러조직 ‘적군파'(R.A.F.)에 대한 언론, 특히 『빌트』의 보도 방식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에 보수 정치인들과 『빌트』는 에세이의 실제 내용과 맥락은 무시한 채 뵐을 적군파의 동조자로 몰아갔으며, 뵐은 이를 통해 심각한 명예 살인을 체험했다. 뵐은 이 체험을 바탕으로 - 또 적군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울리케 마인호프를 하룻밤 자기 집에 재워줬다가 황색언론에 의한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됐던 하노버대학 심리학과 교수 페터 브뤼크너의 경우를 소재로 - 황색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과 과장·날조 보도, ‘빨갱이’ 프레임 씌우기 등을 비판하는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했다.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룬 문학작품들은 그 안에서 다뤄진 문제들이 시의성을 잃으면, 함께 잊혀지거나 발표 당시와는 다른 맥락에서 읽히게 된다. 『카타리나 블룸』 역시 독자들에게 여전히 많은 문학적 즐거움을 선사해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읽힐 수밖에 없다. 『빌트』의 보도행태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대중지로서 여전히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지만 독일 사회는 더 이상 정치적 목적을 가진 언론의 왜곡보도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이제 격변의 와중에 있던 70년대 초반 독일 사회의 문학적 기록이자, 매스미디어 시대 언론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또 뛰어난 서술기법과 실험적인 시간구성, 흥미진진한 심리와 성격 묘사 등을 보여주는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카타리나 블룸』이 독일 70년대의 문제의식과 현재성을 그대로 가지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작년 여름, 독일 문학 작품을 몇 차례 함께 대학로 무대 위에 올렸던 모 연출이 다음 공연을 위한 작품을 빨리 정하자고 독촉하는 전화를 해왔을 때였다. 『변신』(카프카)의 성공적인 공연 후, 이번에도 독일 작품을 공연하기로 이야기가 된 터였다. 연극 ‘변신’에서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영혼 끝까지 잠식당한 젊은이의 황폐해진 실존과 함께 되살아나는 개발독재의 망령을 상징적·비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었다면, 이번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그런 고민 중에 뜬금없이 떠오른 것이 바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독일에서, 그것도 무려 40여 년 전에 발표된 『카타리나 블룸』이었다. “『카타리나 블룸』은 어떨까요?” 작품을 읽고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연출은 이미 어서 각색을 해서 넘겨달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서양의 고전’이란 무엇일까? ‘고전’은 원래 서양문화의 근원으로 이해되는 고대 그리스의 예술작품들을 뜻하지만, 이 단어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략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의심의 여지없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과거의 예술작품’을 뜻한다. 독일 문학 작품 중에서는『파우스트』『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괴테의 작품들이나, 『부덴브로크 가』『마의 산』 등 토마스 만의 작품들, 『변신』『소송』과 같은 카프카의 작품들이 흔히 ‘고전’으로 분류되곤 한다(서울대가 선정한 ‘서울대 학생들을 위한 권장도서 100선’에는 『파우스트』『마의 산』『변신』 및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고전’ 목록이나 ‘필독서’ 목록은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독자들에게 독서의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고전을 분류하고 읽을 때 쉽게 간과되는 것은 모든 고전이 그 작품이 쓰여진 시대의 산물이며, 따라서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없는 경우들이 흔히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뛰어난 문학작품들은 문학적 기법과 완성도 면에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문제의식은 본질적으로 시대에 종속된 것이며, 그러한 시대적 맥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예컨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 논쟁이나 시민계급과 귀족계급의 정치적 갈등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죽음에 이르는 열정적 (짝)사랑’을 다룬 연애소설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TV에서, 영화관에서 그보다 더 열정적이고 몇 배는 더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지 않은가? -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이 대체로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것이라 하더라도 낯설 수밖에 없는 백 년, 이백 년 전 유럽의 시대적 맥락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해가 전제돼야 올바로 감상할 수 있는 서양의 고전을 진정으로 재미있게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의 재미를 포기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단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고전’이 주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짙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 고전들 또한 존재한다. 예컨대 카프카가 묘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는 어느덧 전 지구적인 현상이 돼 우리의 일상까지도 규정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반 독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독자들까지도 섬뜩한 감동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카타리나 블룸』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 고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카프카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지는 정보의 왜곡과 날조, 이를 통한 여론의 조작과 선동. 40여 년 전 하인리히 뵐로 하여금 『카타리나 블룸』을 쓰도록 만들었던 독일 황색언론의 행태는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언론에게서 너무도 자주 목격하는 것이다. 독일인들의 어두운 과거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2017년에 『카타리나 블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독일인들이 아니라 한국의 독자들인지도 모른다.

장편 소설을 1시간 반 분량의 희곡으로 옮기는 재미있고도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카타리나 블룸’은 대학로의 한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관객들은 50여 년 전 독일의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현실을 떠올렸다.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에 조금은 거리를 두고 흥미 위주로 극을 바라보던 관객들도 카타리나의 운명에 중첩되는 우리의 현실을 인식하며 연극 속 카타리나만큼이나 절망하고 분노했다. 격한 감정 속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더 나은 세상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에 대해 조금은 더 구체적인 전망을 가지게 됐을까? 서로 다른 수많은 관객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짙은 감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전’이, 혹은 - 이 단어가 가진 절대성을 전제로 하는 듯한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과거의 좋은 문학작품이 가진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맥락이 아무리 오늘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때로 번거로운 것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의식과 성찰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순간의 현실을 파헤치고 뒤집어 그 본질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사족 한 가지. 첫 번째 공연을 마치고 재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가 한국판 『차이퉁』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 언론사에서 연극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취재,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모두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은 뻔뻔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일까?

홍진호 교수(독어독문학과)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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