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미디어 속 판타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그런 이야기. 그렇지만 일어날 확률은 매우 희박한 그런 이야기.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고, 다른 사람과 영혼이 바뀌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그런 이야기. 요즘은 ‘그런’ 이야기가 대세다. 주술을 부리고 금과 은을 뚝딱 내놓던 도깨비와 죽은 이들을 인도하는 어둠의 대명사 저승사자가 올 겨울 한국의 안방극장에서 만나 시청자들의 마음을 녹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몇 초도 안 걸려 오가고, 이제는 사극과 현대극을 구분한다는 개념이 고리타분할 정도다. 텔레비전을 켜면 판타지 드라마가 쏟아지는 요즘은 그야말로 판타지 드라마의 전성시대다.

뜨는 판타지 드라마의 흥행공식

요즘 드라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다. 모두가 ‘그건 말도 안 돼’라고 외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타지 드라마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판타지는 아니다. 가지각색의 스토리라인과 캐릭터를 가진 판타지 드라마들은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그들을 펑펑 울리기도 한다. 최근 종영한 <찬란하고 쓸쓸하神-도깨비>(도깨비)는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 최초로 평균 시청률 20%를 돌파했으며, 판타지 드라마는 황금시간대의 드라마 전쟁에서 가뿐히 승리하곤 한다. 이렇게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판타지 드라마엔 소위 말하는 ‘흥행공식’이 존재한다.

더 이상 드라마의 주인공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미지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이들은 옛 설화와 민담, 전설 속에서 빠져나와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함께 살아간다. 대표적으로 안방극장을 뒤흔든 <도깨비>는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도깨비, 인간의 죽음을 인도하는 저승사자,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할매 등의 캐릭터가 등장해 동양적 색채와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판타지 드라마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됐던 <푸른 바다의 전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이라고 할 수 있는 『어우야담』 속 인어를 모티브로 삼았다.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인어는 물속에선 인어지만 뭍으로 나오면 사람이 되고, 입맞춤으로 상대방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 <푸른 바다의 전설>을 전편 챙겨봤다는 이미현 씨(39)는 “부끄럽지만 어렸을 적 인어공주가 꿈이었다”며 “드라마를 통해 10시가 되면 인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멀게만 느껴졌던 구미호, 외계인, 뱀파이어는 이제 드라마 속에서 우리의 친구 혹은 반려자가 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간과는 차별화되는 특별하고 초월적인 감각을 자랑하는 주인공도 등장했다. 이는 누구나 해봤을 초능력에 대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을 그린 이야기 <너의 목소리가 들려>, 냄새가 눈으로 보이는 초감각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냄새를 보는 소녀>,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절대 청감 능력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보이스>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초월적인 감각의 소유자들의 모습이 드라마 속에 그려진다. 판타지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시청자 김서연 씨(23)는 인상 깊게 본 드라마로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꼽으며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며 자신의 상상을 실현시켜준다는 점을 판타지 드라마의 매력포인트로 꼽았다.

인간의 유한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혹은 극복할 수 없는 먼 거리다.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탈피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시그널>, 그리고 일반적인 공간 여행에서 한층 업그레이드 돼 현실과 웹툰이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넘나드는 <더블유>까지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체험한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았지만 <시그널> 덕분에 드라마를 챙겨보기 시작했다는 이성준 씨(28)는 “미제 사건들을 과거와의 무전을 통해 해결한다는 발상이 참신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며 “말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지만 속는 셈치고 보면 속은 시원하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판타지는 왜 뜰까

그렇다면 대체 판타지 드라마가 가진 ‘무엇’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박생강 칼럼니스트는 흥행의 이유를 판타지 드라마가 주는 대리만족 효과로 설명하며 “답답한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드라마보다, 그 답답한 현실을 판타지적 설정으로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에 대중들이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조선시대로 가버리거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으로 들어가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통해 시청자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수포자’인 고3 여주인공이 비를 통해 조선에 떨어져 왕 이도와 만나는 드라마 <퐁당퐁당 러브>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한국 고등학생의 속마음을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넌지시 보여준다.

또 단순한 대리만족이나 간접경험을 넘어, 판타지 드라마는 현실 세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진다. 단순히 현실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특별한’ 능력을 현실에 적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냄새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 <냄새를 보는 소녀>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해 현실 속 작은 사건 사고들뿐만 아니라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해결한다. 윤석진 드라마 평론가는 “요즘 우리의 현실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은폐돼 진실규명이 어려운 사건들이 많다보니 드라마에서라도 판타지적인 요소를 통해서 그것이 해결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욕망과 바람을 녹여낸 ‘드라마’는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자극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드라마의 제작환경과 특수효과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며 상상속에만 존재하던 ‘판타지’와 손을 잡았고, 결국 판타지 드라마는 ‘판타지’와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시청자의 품에 안겨줬다. 따라서 과거엔 그저 비현실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수많은 고전문학, 설화, 민담 등도 현실처럼 그려질 수 있게 됐다. 박생강 칼럼니스트는 “판타지 드라마엔 인간과는 다른 비범한 영웅이 등장하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초능력과 초감각을 얻고,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하기도 한다”며 “이 모든 것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변화시키고픈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켜줬다”고 설명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소설이나 일반적인 드라마가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 우리의 소망과 상상을 보다 ‘리얼’하게 그려내 우리를 매료시킨 것이다.

판타지 열풍이 남기고 간 것들

이같은 판타지 드라마 열풍의 중심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생각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판타지라는 설정이 일종의 흥행부적처럼 여겨져 어느새 몇몇 판타지 드라마는 ‘드라마’는 안중에 없고 맹목적으로 ‘판타지’만 좇기도 한다. 즉, 드라마를 위한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를 위한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생강 칼럼니스트는 “판타지적 요소가 있는 드라마가 흥행하면서 이제는 판타지적 설정이 옵션처럼 돼버린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무런 의도나 개연성 없이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힘없는 서사나 매력 없는 등장인물의 단점을 감추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00억 원을 쏟아부은 판타지대작 <사임당, 빛의 일기>는 제작이 확정된 후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상대적 ‘약체’로 평가됐던 <김과장>에게 방영 4회 만에 수목극 시청률 1위의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시청자들은 <사임당, 빛의 일기>에 대해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내놨고, 결국 제작진은 사전제작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재편집하기로 결정했다. 또 판타지적 설정에 익숙해진 대중 때문에 오히려 대중에게 외면을 받는 드라마도 있다. <도깨비>의 후속작으로 방송채널, 방영시간이 모두 동일한 <내일 그대와>는 <시그널>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속 판타지의 주역인 이제훈과 신민아가 주연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1.6%로, 19.6%를 기록했던 <도깨비>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순히 판타지적 요소를 삽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정을 다양하게 변주하거나 혹은 판타지적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꼭 필요하다. 박생강 칼럼니스트는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가 흥행에서나 비평에서나 큰 점수를 받은 이유는 바로 우리가 흔히 설화 속 재간둥이로만 알고 있는 도깨비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해석했기 때문”이라며 “<도깨비>는 저승사자와 도깨비란 존재를 통해 사랑의 본질은 물론 진정한 삶과 죽음이라는 종교적인 화두까지 건드렸다”고 설명했다. 대중이 점점 판타지에 익숙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주객이 전도된 판타지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힘들다. 맹목적인 판타지적 설정보다 판타지적 설정이 작품에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극을 살리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판타지는 말그대로 판타지일 뿐이다. 판타지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때로는 통쾌하고, 때로는 흥미진진한 문제의 해결과 간접 체험이 결코 현실 세계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진 평론가는 “안타깝게도 드라마에서의 대안 모색과 해결이 현실세계로 이어지진 않기 마련”이라며 “오히려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좌절과 절망이 더 커질 수 밖에 없기도 하다”며 판타지 드라마를 통한 ‘대리만족’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따라서 향후 판타지 드라마가 다른 장르의 서브플롯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변주돼, 판타지 열풍이 지나간 자리를 미스터리나 추리 드라마가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된다.

이같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판타지 드라마는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안방극장을 휩쓸었다. 판타지 드라마는 대중의 상상 속에만 존재할 법한 꿈과 바람을 구현해내 그들의 눈앞에 보여주고, 대중은 행복함을 느끼기도, 지친 현실에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오늘 밤만은 당신 또한 ‘어른’ ‘학생’ ‘엄마’ ‘아빠’ 라는 모든 책임감과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삽화: 강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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