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부편집장

우리 사회엔 갑과 을이 있다. 갑에게 을은 언제나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다. ‘을의 행동은 대외적 위상을 저해한다’ ‘을의 행동은 대화를 가로막는 비이성적인 것이다’라는 갑의 인식은 일반적이기까지 하다. 갑은 언제나 침묵하며 을은 언제나 발언한다. 항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을이고 이에 대한 반응은 갑의 의지에 달려있을 뿐이다. 갑과 을은 언제나 정반대의 관점과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대척점에 서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기다림’이다. 갑과 을은 모두 서로의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먼저 갑의 기다림. 갑의 기다림 속에는 을의 지침과 분열이라는 기대가 녹아있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지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을의 외침도 사그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지친 을이 자신을 굽힐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있다. 다음 을의 기다림. 을의 기다림 속에는 절박한 상황과 갑에 대한 마지막 믿음이 녹아있다. 항의나 시위와 같은 어찌 보면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이야기가 전달되지 못할 것이라는, 당장의 생사가 달려있는 절박감과 함께 갑이 언젠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이러한 기다림의 차이는 갑이 ‘침묵’이라는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게 한다. 갑은 급할 것이 전혀 없다. 당장 침묵한다고 해서 갑에게 가는 피해는 약간의 지탄과 이미 거의 사라져버린 양심의 가책일 뿐이다. 아, 가장 중요한 대외적 위상의 저해도 있긴 하다. 갑의 침묵은 을을 깊은 고민에 빠뜨리며 을의 집단 내부에서 분열을 이끌어낼 수 있다. 침묵은 을이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낼 경우 지금보다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장하며, 을에게 굉장한 심리적 압박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때 경고, 감봉, 징계, 해임 등의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면 을의 분열은 더욱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더 나아간 전략적인 침묵의 방법도 있다. 작은 집단 내의 갑과 을이 대립할 경우, 갑이 그 집단 운영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을 경우 더욱 효과적이며, 실제로 특정 집단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말의 침묵에서 한 단계 나아간 ‘권한 행사의 침묵’이다. 인사 문제, 예산안 등의 중요 사안에 대한 최종 결재를 온갖 사유로 이행하지 않는 침묵이 이에 해당한다. 을의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갈등과 불확실성 때문에 안정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갑은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을의 행동으로 돌림과 동시에 권한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갑의 권한을 더욱 강하게 행사하는 기만적 침묵이다.

이러한 갑의 전략적, 기만적 침묵 속에서 을이 자신의 주장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을의 주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이를 통해 갑의 침묵을 깰 수 있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 바로 공론화다. 갑에게 침묵이라는 무기가 있다면 을에게는 공론화라는 정반대의 무기가 있다. 갑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갑질이 사회에 알려져 지탄의 대상이 돼 고귀한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공론화뿐이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이랜드로부터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우리 학교 노동자들이 택한 방법도 결국 공론화였다.

우리 대학신문은 그간 이런 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공론화의 역할에 충실했는가. 우리 스스로가 을의 입장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진 않았는가. 우리도 갑의 침묵에 동조해 입과 귀를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을이 됐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것인가.

결국 우리도 언젠가 을이 될 수 있다. 아니 지금 당장 우리가 을일 수 있다. 무리한 요구, 부당한 대우, 자신에게 유리한 권한의 행사 등에서는 말을 아끼지 않는 갑. 하지만 정작 을이 목소리를 낼 땐 침묵을 아끼지 않는 갑. 권한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강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갑의 전략적 침묵. 그 속에서의 우리들. 우리 사회에선, 우리 조직에선 을의 외침은 아직 너무나도 쓸쓸하고 고독하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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