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별세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하루는 빈틈없이 꽉 차 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미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 어느 것도 안정을 보장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더욱 최선을 다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에서는 하루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가 바삐 오간다. 그렇지만 개인들 사이의 유대감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큰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불안하고 피로한 삶을 살고 있다. ‘액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각자의 뗏목에 몸을 맡기고 파편화된 채로 표류하고 있는 셈이다.

2017년 1월 별세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액체 사회의 유동성에 주목해 ‘액체 연작’을 펴내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유대인으로 폴란드에서 나고 자랐지만, 반유대주의가 폴란드를 뒤덮으면서 조국을 떠나야 했다. 영국 망명 이후 그는 탈현대성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고 2000년대에는 ‘유동하는 현대성’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창시해 유동적 사상가로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견고한 것들을 녹여” 관습화된 현실을 해방한다는 『공산당 선언』의 표현에서 ‘액체성’ 메타포를 생각해냈듯이 그의 사상적 배경에는 한때 열성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과거가 자리하고 있다. 정일준 교수(고려대 사회학과)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지만 이는 패착이었다”며 “바우만은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그다음에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액체 현대’

 

1990년대 후반 바우만은 ‘탈현대성’ 개념에 주목했다. 그는 현대성을 대변하는 신뢰와 확신 같은 가치가 환상에 불과하며 탈현대에서는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주장했다. 근대인들은 각종 이변과 불확실성을 배격하고 더는 변화가 필요 없는 합리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완벽에 이를 때까지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쌓고, 과거의 지혜와 규범에 맞춰 행동하며 정형화된 질서와 규범을 구축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의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변한다. 제도나 질서 체계는 불안정하고 어느 사회집단이든지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관리할 수 없는 이방인들이 존재한다. 이일수 교수(군산대 영어영문학과)는 “현대 자본의 유동성 때문에 우리가 확실하다고 알고 있는 사회관계들, 예컨대 가족, 직장, 사회, 국가 같은 모든 단위들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며 “고체 근대의 견고성이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공동체, 헌신, 신뢰 같은 가치들이 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바우만은 20세기를 지나며 인류가 지난 200여 년간의 ‘고체 근대’를 넘어 ‘액체 현대’로 나아갔다고 해석하고, 이를 ‘유동적 현대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표현했다. 이 교수는 “유동적 현대성은 기성 제도와 가치를 해체하는 힘을 해석하는 데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바우만은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액체 현대 이론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예측 불가능성까지도 자본의 축적 양상이 변화하고 사회가 발전한 데에 따른 결과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역사가 진보해왔다는 서술에 회의적 시선을 던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차별점을 지닌다.

액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큰 자유를 누린다. 바우만은 이를 각종 선택과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던 족쇄들이 모두 녹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 과정에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유대관계까지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액체성의 메타포가 “자원이 끊임없이 사회의 각 지점을 쓸어내리며 더 크게 고인다는 해체력과 축적력을 강조하는 비유”이며 “무거운 고체 근대에서 가벼운 액체 현대로 이행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즉시성과 가변성, 관계의 휘발적 속성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도 “고체 근대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지만 액체 현대에서는 흩어져야 살 수 있고 뭉치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모든 책임과 부담은 각 개인이 짊어진다. 장경섭 교수(사회학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본질적인 공동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전시(戰時)에서 전시(展示)로

 

바우만은 불확실성과 더불어 ‘상대성’을 액체 현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그는 고체 근대와 액체 현대의 권력자들을 각각 정원사와 사냥꾼에 비유해 설명했다. 고체 근대에서는 권력 집단이 사회 전반을 설계하고 관리했다. 정원사들이 모든 식물이 제자리에서 자라게끔 노력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잡초들은 뽑아버리듯이 근대의 권력자들은 교육을 통해 충실한 일꾼과 애국자들을 솎아내려고 했다. 복지체계는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는 온실 역할을 하고, 교도소와 소년원은 병충해를 막듯이 질서를 해치는 사람들을 격리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액체 현대에서는 사물의 균형과 질서에는 무심하고 그저 사냥에만 집중하는 사냥꾼들이 사회를 지배한다. 사냥꾼들이 자루를 가득 채우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끝없이 실체 없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삶의 의미나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교수는 “바우만은 현대인들이 헌신해야 될 가치나 대상을 쉽게 갈아치우고 거기서 오는 허무를 또 다른 쇼핑으로 채우는 악화일로를 걷는다고 했다”며 “유동하는 현대는 더 많은 소비와 기업 이윤 축적, 그리고 이를 통한 일회적 인간관계의 양산을 통해 더 많은 개인을 소비 사원으로 내모는 구도”라고 지적했다. 억압의 사슬이 녹아버린 지금, 완전경쟁사회에 놓인 현대인들 앞에는 사냥꾼이 되거나 그 대열에서 추방된다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정원사 비유에서 보듯, 문명화된 근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을 통제하며 자유를 과도하게 포기했다. 당시의 인류는 권력자가 짜둔 판 안에 머무르는 대신 노동, 인간관계에서 국가안보에 이르기까지 지금보다 강력한 확실성을 갖고 있었다. 현대인들은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훨씬 큰 자유를 누리며, 당위성을 띤 요구나 명령을 강제적인 힘의 행사로 느낀다. 정 교수는 이를 두고 “자본이 개인을 속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과도한 사회”라고 표현했다. 과도한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액체 현대의 개인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주장했듯이 안전보장이 없는 자유는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울 뿐이다. 결국 현대인들은 자유와 안전보장 사이의 균형을 잃고,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내보이는 것을 감수하고 자신의 신용정보를 넘기며 거대 자본에 기꺼이 위임하며 자신을 감시해달라고 청한다.

바우만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대치하던 고체 근대와 달리, 액체 현대에서는 두 영역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침범하고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파괴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대중매체에는 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물론이고 비밀의 영역까지 아낌없이 전시된다. 고체 근대에서는 성적 활동처럼 은밀한 비밀을 선별된 몇몇 사람들과만 공유하며 긴밀한 상호 연대를 이뤄왔다. 하지만 유명인들의 개인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하듯, 액체 현대에서는 이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전면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 그는 프라이버시로 대변되는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침범하는 현재의 위기가 사람들 간의 유대관계가 쇠퇴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바우만은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봤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휴대전화로 서로의 네트워크에 흔적을 남기며 소통한다. 그는 휴대전화를 “소규모의 공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구성요소”라고 상정했다. 그 네트워크에서 우리는 “항상 민감하게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원하면 얼마든지 접속을 끊거나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휴대전화는 공적 영역의 의무를 무너뜨리고 사적 자유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네트워크는 ‘소속된 공동체’ 개념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없애버리면서 인간관계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뿐이다.

 

현대사회, 해답은 없지만 희망은 있다

 

‘액체 현대’는 지금껏 인류가 겪어 온 ‘고체 근대’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개인 간의 유대가 약해지고 각자의 삶은 파편화된다. 과거를 지침 삼아 삶을 설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매 순간 모든 상황이 급변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오로지 개인이 져야 한다. 이 교수는 “바우만은 유동하는 자본의 해체력에 직면한 개인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갈 역사 단계에 놓여있다고 역설했다”며 “유동하는 속성을 면밀히 살펴보고 삶의 가치와 중심을 굳건히 뿌리내릴 저력이 더 긴요해진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바우만에게는 바로 지금이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의 방식에 도전할 때다.

장 교수는 “탈현대성에 대해 사회과학적으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저작물이 별로 없다”며 바우만의 저작이 이러한 수요를 맞췄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이 교수도 “모든 견고한 것들을 해체하는 자본의 위력이 이 지점까지 왔다고 정밀하게 짚어준 것이 바우만이 현대 사회학 분야에서 이룬 성취”라고 말했다. 바우만은 ‘유동성’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책을 수십 권 펴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다. 인류는 전환기를 맞이했고 과거를 준거로 삼은 학습이나 계획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통신기술의 혁신으로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지만 역설적으로 유대감은 약해지고 있다. 공동체는 사라지고 수백 수천 명의 친구와 클릭 한 번에 관계를 맺고 끊을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의 공동체성과 고유성이 약화하는 지금, 억압과 착취는 국가 단위를 넘어 전 지구 단위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는 국가에 기대서 해결할 수 없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에서 확실한 것이 이제는 없으며 모든 것은 제멋대로 흔들린다고 주장하지만, 윤리적 주체로서 인성을 갖추는 것 외에는 위기를 헤치고 나갈 구체적인 방안을 알려주지 않았다. 정 교수는 “어떠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것부터가 고체 근대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유동하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답을 제시하는 게 무의미하다.

바우만에게 현실은 어떠한 체계나 질서가 아니다. 정 교수는 바우만의 이론을 영화 <워터월드>에 빗대 “세상이 바다로 바뀌었는데 어디에 발을 딛고 있어야 안전할지 혹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것은 잘못된 얘기”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학계에서는 ‘액체성’이라는 메타포가 지닌 학술적 설명력이 약하고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 현상만을 제한적으로 다루는 데 그친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교수도 “유동하는 현대에서 국가의 허구성을 돌파하고 자족적 삶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여타 현안들에 비해서는 다소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모든 것이 유동하더라도 자본주의나 소비주의 같은 큰 틀의 견고함은 깨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러한 현실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더는 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순간이야말로 가장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며,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도 개개인이 힘을 합쳐 공동의 문제를 인식하고 함께 노력한다면 흔들리는 현대사회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바우만은 희망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현대인 개개인의 의지에 달렸다.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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