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서울대 인문소극장에서는 2001년 3월 두레문예관의 무대에 올랐던 작품이 다시 관객을 찾았다.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1904)이다. 관악에는 수십 개의 극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끔은 같은 작품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 다른 극회에 의해 상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1594)과 장진의 ‘택시 드리벌'(1997)도 그랬다. 그리고 물론 작품은 공연을 만든 사람들과 분위기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유의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같은 극회(총연극회)에서 16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작품을 공연한 것이다. 16년이란 시간은 대학에서 4번의 세대교체를 뜻한다. 마치 고조할아버지의 공연을 손주들이 재상연한 것과 같다. 아마도 그 때문에 먼 과거의 공연과 며칠 전의 공연은 많이 달랐다. 두 개의 공연을 관람한 나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공연 당시 나는 공연 속에 있었다.

작품 제목의 벚꽃동산은 귀족 남매의 소유이다. 빚더미에 오른 그들은 벚꽃동산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고 정든 고향을 슬프게 떠난다. 작품은 그렇게 끝난다. 16년 전에 나는 남자 귀족 역할을 몸소 연기했는데도 사실 마지막 장면에 슬프지 않았다. 어쩌다가 마지막 공연에 눈물이 났는데, 그것은 공연이 끝나는 아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제는 정말 많이 슬펐다. 왜 그랬을까?

나는 네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그 전에도 이사를 자주 했다. 나에게 고향(故鄕)은 있지만, 고향(古香)은 없는 것 같았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 그곳의 냄새와 분위기가 밸 터인데, 나의 삶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는 푸근한 향기를 주는 곳이 없었다. 독일에 유학을 가서 의도치 않게 긴 시간을 머물다가 고향(Heimat)에 대한 의미·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성탄절과 부활절마다 독일 친구들은 고향으로 떠났고, 나는 타국에 홀로 있었다. 너무 멀어서 갈 수 없는 한국이 참으로 그리웠다. 향수(鄕愁)가 나에게 고향을 선물해 준 것이다. 어찌 보면 유학의 가장 큰 성과는 고향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제는 고향을 잃고 떠나는 주인공 남매의 슬픔을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벚꽃나무는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만발했을 때의 화려함과 풍성하게 맺은 열매는 잘 베푸는 멋진 귀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귀족 남매를, 벚꽃동산은 그들의 집과 고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무에 더 이상 열매가 열리지 않았고, 가문은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막은 벚나무를 베는 도끼 소리와 함께 올라간다. 벚꽃동산의 새 주인(신흥 자본가)이 그곳에 별장을 지어 숙박업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10분 후면 귀족 남매가 영영 떠나버릴 터인데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공사를 벌인 것이다. 도끼에 찍혀 넘어가는 벚나무들은 곧 끝날 두 남매의 삶을 암시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암시도 뒤따른다. 두 남매보다 더 오래 그 동산에 살았던 하인은 텅 빈 집에서 홀로 남아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고향의 파괴와 상실 앞에서 고향을 떠나는 이들과 고향과 함께 죽음을 맞는 이. 그들의 슬픔이 나에게 진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사람들이 나에게 모교를 ‘Heimatuniversität’라고 부르는 법을 알려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연의 마지막도 매우 인상 깊었다. 도끼 소리가 다시 울리는 가운데, 마치 수의를 입히듯 하얀 천이 무대 전체를 덮었다. 나는 고향과 벚꽃동산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극장을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는지도(Schwermut) 모른다.

한충수(한국산업기술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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