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그들은 단과대 게시판, 학생회관, 중앙도서관 터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4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이라면 벌써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그들은 바로 우리가 매일 읽고, 때때로 쓰기도 하는 대자보(大字報)다. 이에 『대학신문』은 대자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자보는 말 그대로 큰 글씨로 무언가를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대자보의 물리적 형태 자체는 더욱 흔히 쓰이는 말인 ‘벽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자보를 대자보라 부르고 대자보가 독자적인 주체로서 대학가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것이 일종의 ‘불온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자보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일찍 꽃을 피운 중국에서 대자보는 단순한 벽보의 의미를 넘어서 강력한 저항과 선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대자보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금은 허가된 장소라면 그 어느 곳에나, 어떠한 내용으로든 대자보를 붙일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쉬워진 담론 형성은 오히려 대자보가 가지고 있는 입지를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공공연히 글로 써 붙이는 것 마저 금지되던 시절이 있었으며, 어느 때에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터져 나와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입은 막고, 손은 묶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헌정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는 △유언비어의 날조·유포 금지 △금지행위의 선동·선전 및 방송·보도·출판 등 전파행위 금지 △이 조치의 위반자 및 비방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당 조치를 위반할 경우 15년 이하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라는 중형을 선고 받게 됐다.

이러한 상황 아래, 대학에서 정권을 비판하거나 사회에 대해 쓴소리를 던지는 대자보를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신정권 시기에 대학생이었던 오수창 교수(정치학과)는 당시 대자보를 쓰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고 묘사했다. 그는 “화장실 안에서 반정부 낙서만 하나 발견돼도 형사들이 대거 출동해 범인을 색출하려고 하는 시대였다”며 “학내에 형사들이 상주했고 행정실과 본부 직원 중에는 정보기관의 관리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조그만 낙서 하나마저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시기였던 만큼, 대자보를 쓴다는 것은 인생을 걸어야 할 중대한 문제였다. 박원호 교수(정치학과)는 이에 대해 “정치적 탄압의 과정을 거치며 대자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저항’의 상징성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압의 시대 속에 지금의 대자보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학회와 학생들이 직접 만든 전단, 속칭 ‘가리방’이라고 불리는 종이들이었다. 학내에 사복 경찰이 수십 명 씩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공개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저항의 의지를 가진 학생들은 음식점 골방이나 자취방 등에서 학회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수창 교수는 “당시 ‘노동야학’이라 해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야학도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매우 위험했던 시대인 만큼 학회 활동에 모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종이들의 향연, 활자의 폭포를 만들다

긴급조치를 필두로 한 암흑의 시대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한민국에는 짧게나마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대학은 권력의 탄압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서울대는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대자보가 범람하는 일시적 변화를 맞게된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들인 ‘서울大(대)「大字報(대자보)」범람…“自制(자제)하자”온건내용도’(1980년 4월 18일자), ‘學生(학생)여론을 主導(주도) 大學街大字報(대학가대자보)’(1980년 5월 2일자)를 보면 학내에 대자보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수창 교수는 “당시 대자보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붙었기 때문에 웬만한 정성이 아니고서야 다 읽어볼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그 때의 대자보는 대부분 익명으로 쓰여 있었고 북한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도 여럿 있었기 때문에 3명의 서울대생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대자보의 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다시금 대학은 예전과 같은 암흑의 시기로 돌아가게 된다. 대학이 다시 한 번 봄을 찾게 된 것은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캠퍼스 유화국면’을 거쳐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이 일고 난 이후였다. 학생들을 감시했던 사복경찰들은 일제히 대학에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자보는 대학생의 의견표출 수단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1984년 4월 23일에 게재된 전두환 정권의 전방부대 교육에 항의하는 대자보다. 사진제공: 서울대 기록관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던 만큼 대자보는 서울대 내의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박원호 교수는 “전자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대자보였다”며 “과방에 가면 항상 대자보를 쓰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고 말했다. 누구나 대자보를 쓸 수 있었고 또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대자보는 지금보다 더 일상생활에 가까웠다. 심지영 강사(불어불문학과)는 “과비를 내라는 단순한 공지도 대자보로 써서 붙였다”며 “대자보는 정치와 일상 모두를 아우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자보로 누군가를 비판하는 자보를 붙일 경우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반박 대자보가 붙을 만큼 대자보를 통한 의견 교환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정치적인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심지영 강사는 “서울대 내의 진보 진영 간의 정파싸움은 대자보의 단골 주제였다”며 “서로 다른 정파들 사이의 의견을 담은 대자보가 하룻밤 사이에도 몇 개나 붙었다”고 전했다.

물론 대자보를 써서 붙이는 과정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수고스러운 노동이 필요했다. 심지영 교수는 “지금처럼 대자보를 인쇄해서 붙이는 것이 상용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자보를 쓰는 것만 담당했던 학생도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 주로 대자보를 썼냐는 질문에 그는 “글씨가 제일 예쁜 학생이 썼다”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새로운 종이는 언제나 환영이야

90년대부터 총학생회는 본격적으로 탈정치화의 길을 걷는다. 또 90년대 PC통신의 개발은 의사소통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초고속통신이 확산된 후 지금의 학내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카페들이 인기를 끌었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는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신선하고도 편리한 매체로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사이버 공간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접근이 가능한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냈고 이에 대자보는 지금까지 굳건히 지켜왔던 자리를 위협받게 된다. 정무용 강사(국사학과)는 “80년대식의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들이 잡지나 PC통신을 통해 개진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정치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자보는 여전히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데 사용됐다. 정무용 강사는 “단순화하기는 힘들지만 대자보는 선거나 특정 이슈들이 발생했을 때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거나 사건 정황을 폭로하는 데 주로 사용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0년대의 등록금 논쟁과 주한 미군 관련 이슈들, GM의 대우자동차 인수와 같은 사건들에 대해 대자보는 여전히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소통 수단으로서의 색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PC통신에서 더 나아간 스마트폰의 출시와 유통으로 인해 개인들은 더 이상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기 위해 컴퓨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몇 개의 글을 써내려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대자보는 학교 곳곳에 붙어 누군가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정치적인 이슈에서부터 특정 단체나 특정인에 대한 비판까지 그 주제의 범위는 과거에 비해 좁혀졌지만 여전히 그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학생들에게 대자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2014년 대자보 붐을 일으켰던 ‘안녕들하십니까’ 운동에 참여했던 안태혁 씨(화학부·14)는 “대자보라는 실물이 주는 호소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대자보를 쓰는 것은 한 글자 한 글자 좀 더 공들이고 노력한 것이니 접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읽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덧붙였다. 대자보를 쓰는 이유에 대해 황경은 씨(미학과·11)는 “인터넷에 글을 쓰면 지인들이나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본다”며 “대자보를 쓰면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그 자체로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누구나 가볍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대자보라는 물리적인 매체는 그 자체만으로 설득과 이의제기에 대한 강력한 상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대자보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정갈한 글씨체로 직접 한 자씩 써내려 가던 무겁고 심각한 대자보들은 인쇄의 보편화로 짧은 시간 안에 쓰고 붙일 수 있게 됐다. 또 ‘민주’ ‘자유’ ‘호국’과 같은 엄숙한 단어들이 판치던 내용은 유행어와 캐리커쳐, 풍자들로 가볍게 채워졌다. 학생들이 더 이상 정치적인 이념이나 사상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대자보도 알고 있었다.

2011년 법인화 본부점거 기간에 게재된 점거 농성의 정당성을 알리는 대자보다. 사진제공: 오마이뉴스

앞으로 대자보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아마 우리가 앞으로 30년간 겪게 될 변화의 속도는 지난 30년간 겪어온 변화의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대자보는 지금까지 숱한 탄압에도 자리를 지켜왔으며 그 자체의 형식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살아남았다. 억압의 시간 동안 생겨난 대자보의 상징성은 어쩌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곁을 지켜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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