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기자
취재부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스파이더맨>(2002)의 한 장면. 주인공 피터 파커의 변화를 눈치 챈 벤 이모부는 그에게 걱정 어린 충고를 한다. “그 날 걔가 맞을 짓을 했다고 해도, 네게 걔를 때릴 권리가 생기지는 않아. 기억해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이후 이모부는 강도의 흉탄에 죽게 되고, 피터는 이모부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저녁 8시쯤 근처 중학교에서 교육봉사가 끝나고 허겁지겁 달려간 전체학생총회(총회)에서 목격했던 장면. 두 번째 표결이 끝나자 점점 늘어나는 퇴장 줄. 일부는 출입통제를 무시하고 스태프의 눈을 피해 얼른 달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1,600명이 넘는 학우들을 앞에 덩그러니 두고 급작스럽게 소집된 총운영위원회(총운위). 분명히 표결이 무효처리 됐음에도, 학우들의 총의를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각 단위대학의 대표들은 재투표를 하지 않기로 의결하고 총회를 해산한다.

이틀 후, 새벽 2시쯤 부장의 급한 연락을 받고 택시를 잡아타서 간 총운위에서 본 한 장면. 조금도 굽힐 수 없다는 듯 양 측의 격앙된 토론이 오가던 한가운데, 아무 말 없이 노트북 컴퓨터로 게임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한 학생대표. 그리고 표결이 원하던 결과대로 나오지 않자 사람들은 누구에게 향하는지조차 모를 위협적인 비난과 욕설을 쏟아낸다.

아마도 이번 주는 내게 이번 학기 중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될 것 같다. 자초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학업에 치여, 기획 준비에 치여, 취재에 치여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 잠시 기대 쉴 곳이 없다는 것은 참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을 사람 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시도와 좌절 끝에 겨우 정상발행 했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갈 방향에 큰 부담을 안고 있을 데스크, “일주일에 두 번만 집에 들어가는 기록을 세웠다”며 씁쓸한 자조를 던졌던 동료 기자, 자신들을 누구보다 앞에서 이끌 거라 믿었던 대표들에게 “집에 가라”는 말을 들었던 학우들, 각자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싸웠으나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사람들.

현실에는 마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극악무도한 악당도, 전지전능한 히어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조금씩 다른 가치관으로 각자의 이익을 좇는 개인과 집단이 있을 뿐이다. 세상이 영화 속처럼 착한 놈과 나쁜 놈, 둘로 나눠져 있으면 얼마나 쉬울까? 그러나 굳이 험난한 길을 선택한 우리는 안개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듣고, 조금이라도 더 전달할 뿐이다.

봄은 아직 멀었다. 내가 아직 두꺼운 외투를 입고 조용한 편집국에서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걸 보면,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하고 일교차가 극심한 걸 보면. 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사계절은 돌고 벚꽃 만개하는 봄은 언젠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 때 나는 숨 가쁜 목소리로 기쁘게 전하겠다. 봄이 드디어 왔다고, 망설이지 말고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져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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