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다. 3월 13일 『대학신문』이 1면을 백지 발행한 후, 그 내부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걱정했다. 기자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절하지 않을지. 그리고 반가웠다. 다시 『대학신문』을 볼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관측하듯,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어쩌면 한국사회는 급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고 조기 대선 정국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학신문』에는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인터뷰가 잇달아 게재되고 있다. 그러한 한편에 『대학신문』의 편집권을 둘러싼 운영위원회와 기자단 사이의 논의 사항이 정리돼 있다. 그리고 시흥캠퍼스와 학내 거버넌스를 의제로 한 학생총회에 대한 기사도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한 단어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성낙인 총장은 취임 초기부터 서울대는 ‘선한인재’를 육성하는 기관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학교 이곳저곳에 선한인재육성이라는 표어가 나붙기 시작했다. ‘창조적 학문공동체’라는 말이 너무나 뻔한 표현이듯이, 선한인재라는 말 역시 모호하고 알맹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누가 누구에게 선하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최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성 총장이 내세우는 선한인재의 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초반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대한민국정부수립(또는 건국) 이후 수십 년을 지배한 독재정부들은 모두 명랑하고 청신한 분위기의 조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정부, 아니 정권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러한 분위기를 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순이나 불온, 아니면 용공(지금의 용어로 하면 종북)이라는 혐의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흥캠퍼스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건대 ‘선한인재 육성’이라는 교육 목표는 밝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즉 말을 잘 듣는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것을 거역할 시 따라 오는 것은 억압이다.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에 대한 물리적 진압과 최근 『대학신문』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러한 선언의 실천인 것이다. 창조적이면서도 말을 잘 듣는 인재, 이것이야 말로 누군가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인재의 모습 아니겠는가.

지금 서울대 학내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무리함을 무릅쓰고 한 가지만 제시해 본다면, 그것은 권위주의일 것이다. 선한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은 교육의 목표가 권위주의의 설정에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신문』 기자단에 대한 ‘윗선’들의 편집권 침해는 바로 이러한 선한인재 육성 운운하는 사람들이 가진 권위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기자단의 항의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발걸음으로 보인다. 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라 응원하겠다.

정무용
(국사학과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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