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정호 기자

 

역사학자 이이화를 말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는 ‘재야 사학자’나 ‘비제도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수식어만큼이나 그의 인생 역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 사정 때문에 대구에서 이리로, 다시 논산으로, 안면도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주역(周易)의 대가였던 아버지 야산 이달(也山 李澾) 밑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미두(米斗)로 번 돈으로 철원에 땅을 사고 사람들을 모아 공동으로 경작하고 소출을 공동으로 나누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충남 은산에서 삼일학원을 운영하면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버지 밑에서 닦은 한문 실력은 그의 역사 연구에 큰 밑거름이 된다.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한문이 아닌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싶어 ‘가출’을 결심한다. 광주로 가서 우여곡절 끝에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다른 동급생들보다 세살이나 많았던 그는 여관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58년 서라벌 예대(지금의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대학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그가 본격적으로 한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63년 「불교시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기자생활 당시 많은 한국학 책들과 논문을 읽으면서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박은식의 「몽배 금태조(夢拜 金太祖)」 등은 이이화가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그는 군사쿠데타와 3선개헌, 유신체제를 접하면서 현실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현실의 모순을 풀기 위해서는 역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동아일보 출판부,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정신문화연구원, 규장각 등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쌓는다.

 

 

그는 흔히 문학가로 알려진 허균을 개혁사상가로 재조명한 「한국혼」, 『허균의 생각』등을 발표하면서 ‘진보적 사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는 소박한 민중사를 중심으로 역사의 대중화에도 힘써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겨레의 역사를 빛낸 인물들』 등 인물사 관련 책을 많이 펴냈다. 그는 저술활동뿐만 아니라 1986년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왔다. 지금은 한국전쟁민간인학살범국민위원회 상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고구려역사문화재단 공동대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소외된 민중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제도권에서 공부하지 않아 도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부하고 말할 수 있어 좋다”는 그는 “민중의 편에서 역사를 바로잡는”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