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 | 영국 헌책방 기행

수줍게 고백하자면 나는 애서가다. 어릴 적 경험이 한몫하기도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심심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다 지루해지면 언덕을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보이는 서적백화점에 들렀다. 도떼기 시장 같은 분위기에, 바닥이나 책장에 책들이 마구 쌓여 먼지가 풀풀 나는 중고서적 전문점이었다. 참고서나 전집을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시끄러운 그곳의 좁은 통로에서 중고 게임 CD를 구경하곤 했었다. 좀 심할 정도로 검소했던 우리 부모님은 책이라면 항상 이곳에서 샀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이나 동화책은 항상 책장이 누랬다. 지금도 내 침대 맡에는 항상 퀴퀴한 종이 냄새가 나는 더러운 헌책이 있다. 영국의 헌책방을 가보고 싶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저 책이 좋아서, 유명 작가들이 많이 탄생한 문학의 나라의 헌책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런던 번화가의 헌책방 거리에서

 

늦은 밤, 런던 거리에 있는 서점의 불은 유독 밝다.

영국에 도착해 처음 찾아간 곳은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의 헌책방 거리였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번화가 채링 크로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의 헌책방 거리를 중심으로 런던 구석구석에는 저마다 특별함을 가진 가지각색의 책방들이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서적을 취급하는 ‘실버문’(Silvermoon), 영국 유일의 범죄 미스터리 전문 서점 ‘머더원’(Murder One) 등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전문 중소서점들은 점점 오르는 임대료와 대형서점과의 가격 경쟁에 버티지 못하고 폐점했다. 대영도서관 근처에 본점이 있던 헌책방 ‘퀸토’(Quinto) 또한 재정상 어려움으로 인해 채링 크로스 가의 작은 분점만 남았다.

선진국이니 우리나라와 다르게 도서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실제로 시장규모는 정체 중이었다. 게다가 영국의 도서유통시장도 한국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시장조사기관 IBIS에 따르면 2015년 영국의 전체 도서 구매자의 반 이상이 온라인을 통해 책을 구매한다고 한다. 반대로 전자책이 출판시장을 급속도로 잠식하면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마존 킨들을 통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통구조가 대형 업체와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되며 영국에서도 동네의 중소형 서점들이 사라지고 ‘워터스톤즈’(Waterstones) 같은 대형 체인 서점만이 체면을 세우고 있었다.

중고책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는 국제개발이나 불공정 무역에 대항하는 시민 단체 ‘옥스팜’(Oxfam)이 있다. 옥스팜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가게’처럼 기부 받은 헌책을 싼 값에 판매해 그 수익으로 제3세계 구호 활동을 펼치는데,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작은 헌책방들의 존립이 어려워졌다. 저렴한 가격과 편의성을 무기로 온라인,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중고 서적의 기부와 판매가 한쪽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현재 채링 크로스의 헌책방 거리에 남아있는 작은 서점은 네다섯 개. 그 중에서 ‘헨리포드북스’(Henry Pordes Books)는 평일 저녁 늦게까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유리로 막힌 나무 책장에 한 눈에 봐도 오래된 판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호밀밭의 파수꾼』 초판본부터 『종의 기원』의 오래된 판본까지, 애서가라면 눈이 돌아가게 하는 책들이 노란색 조명 아래 진열돼 있었다. 옆방에는 역사, 미술 분야의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놓여있다. 지하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1층보다 두 배는 더 큰 공간에 소설책들이 저자 이름순으로 가득히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고 있었다. 손수 고른 책을 들고 있던 리처드 씨는 “직장이 근처라 퇴근길에 자주 들린다”고 말했다. 책방 구석에서는 한 할머니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손님이 많았지만, 헌책방의 재정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헨리포드북스의 주인 프란체스코 씨는 “사실 페이퍼백은 아무리 많이 팔아도 수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인터넷으로도 헌책 판매나 구입을 하고 있는데, 그나마 이윤이 많이 나는 희귀본 거래의 경우 대부분 온라인을 통해 거래가 이뤄진다”고 전했다. “없어지면 어떡해요”라는 기자의 걱정에 그는 “아직은 괜찮다”며 웃어줬다.

다른 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헌책방 퀸토는 프랜시스 에드워즈 서점 지하를 빌려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늑한 다락방 느낌이 나는 지하에 책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1년째 퀸토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케네스 씨는 “옆나라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주는데 우리는 그런 게 부족하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문학 전공생이었는데, 자주 오던 서점의 분위기가 좋아 퀸토에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 화려한 거리 한가운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굳이 힘든 길을 가고 있는 헌책방이 많았다.

 

웨일스의 시골 마을, 애서가의 성지가 되다

 

영국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오로지 책 하나 때문에 찾아가는 마을도 있다. 세계 최초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다. 웨일스의 헤이온와이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 남짓 거리의 헤리포드에 도착해, 그곳에서 또다시 한 시간 가량 버스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다. 주민이 천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 어떻게 애서가들의 성지가 됐을까.

옥스퍼드 대학을 갓 졸업한 리처드 부스는 1962년 마을의 오래된 소방서 건물을 싼값에 구입해 서점을 열었다. 그는 마을의 오래된 소방서 건물을 사들여 헌책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장사 수완이 좋았는지 몇 년 만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 수익으로 마을에 서점 몇 개를 더 열면서 헌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점차 헤이온와이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에 헌책방을 운영하려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이게 되면서 쇠락해가던 작은 시골 마을이 세계적인 헌책방 마을이 됐다. 파주 헤이리 마을도 이곳을 벤치마킹해 만들어졌다.

버스 정류소 옆 마을의 관광안내소를 찾아가면 책방 지도를 받을 수 있다.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마을 중앙에 있는 헤이 성이었다. 성 안뜰에는 무인서점이 있는데,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책장에 붙어있는 통에 1파운드만 넣고 가져가면 된다. 지팡이를 짚고 책을 고르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옆 마을에 사는데 가끔 오면 싼 값에 살 만한 책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비수기라 그런지, 마을에 관광객은 단 한 명, 나밖에 없었다. 덕분에 가는 서점마다 손님이 혼자라 유유자적하게 서점들을 돌아봤다. 헤이온와이에서 제일 규모가 큰 서점인 ‘리처드 부스 서점’(Richard Booth’s Bookstore)에는 그래도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 리처드 부스가 처음 서점을 열었던 그 소방서 건물이다. 1층엔 오래된 희귀본들과 새 책들이 진열돼 있고, 2층엔 헌책들이 분야별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소설 서가에는 책장 두 개가 통째로 디킨스 소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카운터엔 헌책을 팔기 위해 온 한 남자가 직원에게 자기 책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설명하느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추리, 판타지, SF 등 장르 소설 전문점인 ‘머더 앤 매이헴’(Murder and Mayhem)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추리 소설을 좋아해서, 정통 퍼즐 미스테리부터 범죄, 스릴러까지 섭렵했다고 자신하는 기자에게 굉장히 인상적인 곳이었다. 익숙한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브라운 신부부터 들어보지도 못한 탐정 소설이란 소설은 다 있었다.

20개 서점을 모두 돌아보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동화책으로 가득 찬 ‘칠드런스 북샵’(Children’s Bookshop)부터 시집만 취급하는 ‘포에트리 북샵’(Poetry Bookshop), 인문학 전문 서점 ‘아웃캐스트 북스’(Outcast Books)까지. 이렇게 오로지 헌책방으로 만들어진 헤이온와이에는 제각각 다른 색깔을 가진 헌책들이 수많은 애서가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죄, 판타지, 공상과학 소설로 가득 차 있는 머더 앤 매이헴

폐쇄된 기차역이 책을 교환하는 서점으로

 

누군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을 꼽으라 한다면, ‘바터북스’(Barter Books)라고 답하고 싶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안위크,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그곳의 폐기차역을 맨리 부부가 사들여 서로의 책을 교환(barter)하는 헌책 전문 서점으로 탈바꿈시켰다. 한 해에만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서점 하나를 보러 안위크에 온다. 남편,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바터북스를 찾은 알리스 씨는 “에든버러에서 여행을 왔는데, 구경도 하고 아이들 책을 살 겸 들렀다”고 말했다.

하얀색 기차역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면, 대합실의 높은 천장 덕분에 위로 높게 뻗은 서가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대합실의 한쪽 끝부터 반대편 끝까지 책장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그 서가 위, 다리처럼 연결된 기찻길을 장난감 기차들이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기차 대신 장난감 기차가 다니는 바터북스

‘교환’하는 서점답게 매일 수백 권의 헌책이 바터북스를 들어왔다 나간다. 직원 스튜어트 씨는 “바터북스는 헌책을 가지고 오는 분들에게 교환권을 주는데, 그 교환권으로 다른 책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설명해줬다. 도심 한복판의 대형서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책을 사러온 사람들이 많았다.

바터북스는 다른 서점과 달리 초판본만 모아놓은 섹션이 따로 있다. J.K. 롤링이 사인한 해리포터 초판본,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서머싯 몸의 초판본을 발견했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좋아해서, 영국에 가면 꼭 서머싯 몸의 책을 사고 싶었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그의 단편집 초판본을 발견했다. 1931년 런던 힌네만 사에서 출판한 『First person singular』.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도 안 된 비인기작이지만, 기념품으로 샀다.

바터북스가 가장 아름다웠던 이유 또 한 가지는 영국에서 방문한 서점 중 유일하게 봉투값을 안 받았다는 것. 시골 인심이 좋은 건 여기도 매한가지였다. 조용한 시골 마을, 느긋한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나라에도 꼭 한번쯤 가 볼 헌책방들이 많다.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 청계천 책방 거리,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세를 탄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처럼 지역마다 도서 거래의 중심이었던 헌책방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손님이 끊기고 높은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곳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작은 동네 서점과 헌책방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면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아직 작지만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 돌아와 어렸을 적 자주 갔던 서적백화점을 들렀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0년 동안 간판조차 바뀌질 않았다. 여전히 장갑을 끼고 책을 뒤죽박죽 쌓아놓는 땀내 나는 아저씨와 싼값에 참고서를 사려는 학부모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엔 영국의 헌책방처럼 비싼 초판본이나 아름다운 조명, 아늑한 분위기나 낭만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헌책방 또한 우리나라 헌책방만의 매력 아닐까.

헌책의 퀴퀴한 그 냄새만으로도 헌책방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만의 욕심은 아니었으면 한다. 장석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곧 먼지 구름으로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헌책에서 풍겨오는 산(酸) 냄새다. 나를 문학으로 이끈 것은 오로지 그 헌책 냄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식물이 공중으로 뿜어내는 방향(芳香)에 현혹된 곤충처럼 그 헌책 냄새에 유혹되어 그 주위를 아직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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