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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엄마가 믿었던 대한민국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인터뷰] 세월호 희생자 허재강 군 어머니 양옥자 씨

‘어른이어서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온 국민은 다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세월호는 점차 잊혀갔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만이 진상규명을 위해 외로이 싸워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3주기와 선체 인양 시점이 맞물리며 세월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세월호 참사로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아들 허재강 군을 잃은 어머니 양옥자 씨를 『대학신문』이 만나봤다. 

기억저장소 내벽에는 참사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리본 모양의 작품이 전시돼있다.

재강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안산시 단원구 ‘4·16 기억저장소’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커다란 노란 리본 모양의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자리에 앉아 재강 어머니를 기다리며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니, 미수습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액자부터 아이들이 수습된 날짜가 기록된 달력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아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재강 어머니가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기자에게 깔고 앉을 방석을 먼저 건네는 등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여지없이 아들 생각에 목소리가 떨리며 금세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금방 돌아와 줘서 고마워”

사고 소식을 처음 접한 당시의 기억을 재강 어머니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전 8시 46분에 재강이로부터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처음 받았고, 9시 44분에 친구 전화로 헬기가 구조 중이라는 전화가 또 왔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더군다나 몇 시간 뒤 달려간 단원고 강당에서 한 선생님으로부터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내려간 진도 체육관에서 생존자 명단에 재강 군의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재강 어머니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체육관에 도착할 때까지의 순간순간을 분 단위로 기억하던 재강 어머니는 체육관에 도착한 이후의 기억에 대해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며칠이 지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구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언론의 말과는 달리 팽목항에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사뭇 달랐다. “해경이나 해군이 전혀 구조하지 않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하고 있다고 보도하니까, 이러다간 계속 구조에 안 나설 것 같아 우리 유가족들이 지인들에게 계속 알렸죠. 전혀 구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애들 아빠가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세월호 침몰 현장에 다녀왔는데, 토요일 아침엔가 저한테 이제 재강이가 살아 돌아오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면서 이 일이 장기전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재강 군의 부모님은 진도 체육관에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재강 군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참사 닷새 후인 토요일 저녁, 부모들이 청와대에 가겠다고 행진을 했는데, 진도대교에서 경찰에게 가로막혀 되돌아오는 길에 왠지 재강이가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 날 재강 군은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다. 재강 군은 발견 당시 가지고 갔던 가방을 멘 채로 발견돼 본인 확인이 수월했다. “우리는 몇 개월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나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살아있을 때도 정말 좋은 아들이었는데, 죽어서도 엄마 걱정 안 시키려고 금방 나왔나 싶고.”

“아들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재강 군이 어떤 아들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눈물이 고인 채 회상에 잠겼다.

“우리 아들은 정말 멋진 아들, 따뜻한 아들이었어요.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오면 엄마 힘들까봐 자기가 간식 챙겨 먹을 테니까 엄마는 쉬라고 하던 아이였죠.” 재강 어머니는 재강 군을 참 착했던,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던 아들로 기억했다.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겨서 다정다감하게 지내는 걸 지켜보는 게 내 바람이었어요.” 하지만 4월 16일의 세월호는 재강 어머니의 그 희망을 앗아갔다. “항상 보고 싶은 아들이지만 길거리에서 재강이 또래의 아이들을 봤을 때나 살아남은 재강이 친구들이 군대에 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재강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참사 이후 3년이 지났고, 재강 군의 가족도, 살아남은 친구들도, 공부하던 교실도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변했지만, 재강 군만은 아직 단원고 2학년 7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재강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을 해봐도, 상상이 잘 가지 않아요. 살아있던 시절의 모습밖에 생각나지 않거든요.” 애써 눈물을 참던 어머니는 아들을 회상하면서 “안 울려고 하는데 아들 생각만 하면 어쩔 수가 없네”라며 끝내 울먹였다.

재강 어머니에게 재강 군은 특히 애착이 많이 가는 아들이었다. “제가 결혼도 늦은 편이었고, 재강이가 첫째라 저에겐 특별했어요.” 어머니에겐 재강 군이 그 무엇보다 먼저였고, 그랬기에 당신의 삶을 온전히 재강 군에게 바쳤다. “세월호 이전까지만 해도 저는 재강이를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재강이를 잃고 되돌아보니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게 후회스러워요. 제주도 여행 따라간다고 할 때 같이 데려갈걸,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볼걸 하는 후회밖에 없어요.”

“세월호 진상규명이 제가 사는 이유에요”

어머니는 재강 군의 장례를 치른 뒤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아들 때문이죠. 저는 항상 얘기해요. 재강이가 아니라 애 아빠였으면 전 이렇게 안했을 거예요. 그런데 재강이는 제 아들이니까. 재강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진상규명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진상규명 활동은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하던 재강 어머니에게 삶에 대한 한 줄기 끈이 돼주었다. “엄마들끼리 그런 얘기를 종종 해요. 진상규명 때문에 분향소 나와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니까 겨우 사는 거지, 진상규명이 아니면 못 살 것 같다고. 가끔씩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내가 왜 살고 있는 건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분향소 일 때문에 나와서 엄마들과 얘기하다 보면 나아지는데, 진상규명 활동이 아니었으면 우울증에 빠져 극단적인 행동도 했을 것 같아요.”

참사 초기 재강 어머니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매진했고, 이후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세월호 인양 촉구 19박 20일 도보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분향소에서 유가족의 끼니를 담당하는 ‘밥값식당’의 운영도 책임지는 등 많은 활동에 힘을 보탰다. “제 역할은 단지 진상규명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뒤에서 같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개미군단일 뿐이죠.” 특히 재강 어머니는 지난해 7월부터 기억저장소에서 활동하며 희생된 아이들의 기록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기억저장소가 하고 있는 기록물 관리는 원래 나라에서 해야 하는 건데, 정부가 일절 안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죠. 실무자 월급도 우리 유가족들이 뛰어다니면서 모금한 국민 후원금으로 지급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기억저장소에서는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기억교실’을 관리하고 ‘기억 시 낭송대회’를 주최하면서 아이들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힘쓰고 있다. 인상 깊은 일이 없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세종시에서 온 어떤 분이 기억전시회를 둘러보고 그동안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면서 우리에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시기도 했다”며 미소를 보였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이제 알게 됐어요”

아들을 잃은 아픔이 가시지도 않은 채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던 그에게, 정치권의 태도는 상처에 뿌려진 소금과도 같았다.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감추고 막으려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진상규명을 위한 중요한 단초였던 세월호 특별법은 정부여당의 조직적인 반대로 인해 특별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지 못한 채 통과됐다. 어렵게 출범한 특별조사위 역시 정부 시행령에 의해 조사 활동이 크게 제약받았다. 이러한 배경 탓에 특별조사위가 개최한 청문회에 증인들이 대거 불참하고, 참석한 증인들 역시 불성실한 답변 태도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조사위원 분들이 많은 노력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2년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했죠.” 유가족들은 확실한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조사위 기간을 연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정부는 이조차 거부했다. “특별조사위 기간 연장을 위해 유가족들이 농성도 하고 그랬는데, 전혀 이뤄지지 않았어요. 우리가 원하는 걸 다 이뤄주진 못해도 최소한은 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들어주지 않더라고요.”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과정에서 계속된 언론의 왜곡된 보도에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우리가 아니라 여당이 먼저 의사자 지정을 제안했는데도 언론은 마치 우리가 원한 것처럼 보도했고, 보상금과 관련해서도 정부가 먼저 지급을 한 뒤 청해진해운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임에도 마치 우리에게 세금으로 보상하는 것처럼 보도했거든요.” 이러한 언론의 보도는 세월호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악화시켜 진상규명을 위한 동력을 떨어뜨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소송을 진행하는 것도 진상규명을 위한 하나의 방안인데, 마치 돈을 더 받으려는 것처럼 언론이 보도한 탓에 ‘돈 더 받으려고 그러냐?’ ‘이제 그만해라’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대통령이 파면되고, 세월호의 인양이 이뤄지고 있지만 유가족들은 아직까지도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재강 어머니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헌법재판소 인용 판결이 난 뒤 우리 유가족들이 울고불고하는 사진이 보도됐는데, 대통령이 파면돼서 기뻐서 흘린 눈물이 아니에요. 탄핵 사유로 세월호 7시간 생명권 위배가 인정이 되지 않아서, 억울해서 흘린 눈물이에요. 헌법재판소에서 생명권 위배 부분이 파면 사유로 인정됐다면, 진상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현재 인양 과정에서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 역시 여전히 미온적이다. “목포신항의 세월호 인양 현장에서도, 미수습자 가족이 아닌 유가족들은 현장을 지켜볼 수도 없어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와서 유가족들은 만나지 않고 미수습자 가족만 만나고 가고도 마치 우리가 너무 흥분해서 만나지 못했다고 여전히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재강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아들 재강 군에게 편지를 남겼다. “재강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항상 노력할게. 그곳에선 아픔 없이 친구들과 편안하게 즐겁게 살고 있어. 나중에 엄마가 갔을 때 네가 떠나기 전 나를 안아줬던 것처럼 엄마를 꼭 한번 안아줬으면 좋겠어.”

(…)

꽃 같은 목숨을

꽃 같이 거두어 가지 못한 목숨이여
 

꽃 같은 목숨을

꽃이 같이 거두어 간 목숨이여
 

여기 통곡으로도 보내지 못 할 자리

천만 송이 꽃으로 피었나니
 

차마 하지 못할 말

죄가 되고 천벌이 될 말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천만 번을 소리쳐도

부족한 말로
 

용서를 구하고

꽃 한 송이 바치며 피눈물을 삼킵니다

(…)
 

-김별, 「국화꽃」

 

사진: 윤미강 기자 applesour@snu.kr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이용진 기자  lyj1998sk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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