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영 기자
문화부

작곡가에 대한 기사를 쓰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우선 포털사이트를 열어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작곡가 윤이상’을 검색해본다. 작곡가를 검색하면 그가 작곡한 곡, 혹은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에 관한 정보가 나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윤이상을 검색했을 땐, ‘동백림사건’ ‘빨갱이 간첩’ ‘블랙리스트’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고, 그의 음악적 어법과 대표적인 작품은 한참을 뒤적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작곡가 윤이상에 대한 기록은 음악이 아닌 정치적 이념 논란으로 얼룩져 있었다.

윤이상의 발자취를 보면 그는 ‘원조 블랙리스트’인 셈이다. 생전엔 정치적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돼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수모를 당했고, 죽은 후엔 친북이라는 누명으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려 음악적 위상을 모욕당했다. 진작 유럽에서는 영향력 있는 주요 현대음악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에서 그의 음악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슬픈 모순이다.‘작곡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이념 논란에 가려져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 권력에 의해 예술가의 가치가 주목 받지 못하고, 예술가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지난해 알려진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그것의 연장선이다. 과거의 ‘블랙리스트’는 그의 예술활동을 표면적으로 금지시켰다면 현재의 ‘블랙리스트’는 다른 차원의 졸렬한 방법으로 예술가의 ‘밥줄’을 쥐려 들었다. 그렇기에 예술가로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첫째는 예술활동을 하되 권력자가 불편해 할만한 사안은 소재로 삼지 않으며,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같이 하면 국가 문화융성사업에 ‘우선’ 배제되는 일은 없다. 이런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포기하고 예술활동 외에 다른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두 번째 길이다.

예술가는 ‘예술’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 권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예술을 정치 집단의 전유물로 취급하고 예술가의 입을 틀어막아 왔다. 예술가들의 밥줄을 쥐었던 권력집단은 이제 모두 구치소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예술가들의 삶은 팍팍하다. 예술가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마땅한 정책은 나오지 않았으며 문화정책과 행정의 개혁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까지 ‘가난한 예술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입을 막은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땅의 예술가는 언제쯤 ‘예술’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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