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명/79명, 5,531명/1,168명. 15일(토)까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밝힌 삼성 반도체·LCD 노동자 직업병 피해자/사망자 수와 지난 2일(일) 환경보건시민센터가 밝힌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사망자 수다. 이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피해 신고가 끊이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매주 목요일 광화문이나 여의도 옥시 사옥 앞에서 옥시불매운동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재작년 10월 7일 시작된 삼성 서초 사옥 앞 반올림의 24시간 농성은 오늘로 559일에 접어들었다. 그들이 지난한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는 피해 원인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보상이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화학물질이 어떤 면에서 위험한 것일까. 화학물질 참사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이고, 참사를 예방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화학물질이 만들어지고, 이를 이용해 제품이 생산되고, 소비자가 제품을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짚으며 화학물질 참사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원인을 알아본다.

 

 

화학물질, 왜 위험한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화학물질이 존재하고, 사용되고 있을까. 미국화학회 CAS번호*에 따르면 현재까지 화학적 구조가 알려진 물질은 약 1억 3,400만 종이고, 매일 15,0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합성 또는 발견되고 있다. 수많은 화학물질 중 전 세계적으로는 12만여 종, 국내에서는 4만여 종의 물질이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최경호 교수(보건대학원)는 “현대인은 오래전에 개발된 샴푸나 비누 없이는 제대로 생활하기 어렵다”며 “현대 사회는 화학물질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대는 화학물질이 대량으로 제조되고 소비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화학물질이 갖는 유해성의 종류와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 코를 막고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토하듯이, 자극성 물질이나 과민성 물질은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화학물질은 발암성, 생식 독성, 발달 독성 등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정상적인 건강 상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독성을 가질 수 있다. 김성균 교수(보건대학원)는 “위험성이 즉각 나타나는 물질 이외에도 암이나 불임, 기형아 출산, 성장 장애, 대사증후군 등 장기간에 걸쳐 인체에 손상을 줄 수 있는 화학물질이 있다”며 “화학물질이 위험하다는 것은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화학물질이 유발하는 피해는 특정 화학물질에 누가, 어떻게, 얼마나 노출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임신 특정 시기에 플라스틱에 많이 존재하는 DHP에 노출된 임산부는 요도하열을 가진 남자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입으로 적당량 먹으면 괜찮은 타이레놀도 같은 양을 주사로 맞으면 쇼크를 준다. 또 자연에 존재하는 정도의 방사성 물질은 인체에 큰 해가 없는 반면, 우리가 매일 같이 마시는 물에도 치사량이 있다. 어떤 물질이든 노출 대상과 경로, 양에 따라 사람에게 피해를 줄 위험이 있다. 사실상 모든 화학물질이 유해할 수 있는데, 적은 양으로 대다수 사람에게 즉각적인 악영향을 주는 물질만 유해물질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화학물질과 모든 유해성 항목에 대해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노출 대상과 경로, 양을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화학물질을 하나의 독성 항목에 대해 평가하는 데 수억 원 수준의 자금과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에 15,000종의 새로운 물질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모든 화학물질의 완벽한 독성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산업계는 실제 역학적 증거에 기반해 생산을 규제하라며 유해성 평가 자체에 반발하기도 한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질이 실제로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최경호 교수는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분명한데, 담배 회사에서는 담배 이외에 폐암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며 직접적 인과를 밝히라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역학에 근거해 화학물질을 관리하면, 관리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 아무것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현실적 장애물과 산업계의 반발로 우리가 유해성을 알고 있는 화학물질은 극히 드물다. 유해성 정보가 있다고 알려진 국내 화학물질은 15%인데, 그것조차 수십 가지의 유해성 항목 중 한두 가지 항목에 대한 정보일 뿐이다. 유해성을 알지도 못하는 화학물질이 상업적으로 대량 제조·수입·판매되면 기업은 그것을 재료로 제품을 생산하고, 개인은 화학물질로 이뤄진 제품을 소비한다. 결국, 기업에 고용돼 사업장에서 화학물질을 다루는 근로자와 실제로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몸에서 재앙이 나타나고 나서야, 뒤늦게 화학물질이 갖는 독성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김성균 교수는 “보통은 참사가 일어난 다음에 교훈을 얻는 경우가 많다”며 “참사 후 화학물질 관리 체계를 정비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유해성 평가는 화학물질이 갖는 고유한 독성을 동물 실험으로 알아내는 평가다. 위해성 평가는 화학물질이 인체에 도달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설정해 화학물질이 인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정하는 평가다. 역학 조사는 화학물질에 의한 사고가 발생한 후 실제로 질병이 일어난 사람을 중심으로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조사다. 최경호 교수는 “시민 단체에서는 유해물질 사용 자체를 줄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산업계는 유해성 평가 대신 역학 조사에 기반해 생산을 규제하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영업비밀’로 무너진 산업안전

대부분의 화학물질은 기업의 제품 생산을 위해 제조·수입·판매된다. 사업장에서는 각종 화학물질이 취급되기 때문에 근로자가 고농도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기 쉽고, 근처 주민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대형 사고의 위험이 크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환경 이슈보다 사업장 내 노동자의 문제는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실제로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고 당시 구미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됐음에도 노동부가 2~3주 동안 사업장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아 근처 사업장 내 노동자는 대피하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백도명 교수(보건대학원)는 “화학물질의 문제는 사업장에서 보고되는 경우가 제일 많다”며 “사업주와 근로자는 수직적 관계여서 근로자가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사업장 참사를 방지하려면 사업장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파악하고, 근로자가 그것의 위험성을 숙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보통 화학물질은 제조자와 사용자가 다르기 때문에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조차 공정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료에 특허가 있어서 기업이 원료 내 성분과 양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성균 교수는 “원료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사 오기 때문에 기업도 무엇인지 모르고 쓰는 것이 관행”이라며 “엄격히 유해성을 평가하면 제품 가격이 올라가 생산 활동에 문제가 생기니 아예 유해성 평가를 안 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설령 기업이 화학물질 정보를 알고 있더라도 근로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정보는 거의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자가 근로자에게 안전보건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효성이 떨어진다. 작년에는 경기 부천의 삼성 및 LG전자 휴대폰 3차 하청 사업장에서 휴대폰 부품 가공 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사용하는 메탄올의 농도가 너무 높아 근로자 5명이 실명했다. 윤충식 교수(보건대학원)는 “메탄올의 공기 중 농도가 높아 사람이 실명하는 사건은 정말 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라며 “하청 업체 사장과 근로자 모두 몰랐다고 하니, 사업장에서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 전달이 얼마나 안 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윤 교수는 “원청 업체에서 정말 돈을 조금 줘서 하청 업체가 안전보건을 할 여력이 없기도 하다”며 한국 노동시장의 외주화 구조가 사업장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다는 점도 덧붙였다.

참사 발생 후에도 참사의 원인이 규명되고 근로자가 보상을 받기까지는 더 험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근로자는 산재 인정을 받아야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현행 체계에서는 산재 입증의 책임이 근로자에게 있다. 예를 들어, 백혈병이라는 질병이 산재임을 증명하려면 근로자가 사업장에 유해 수준 이상의 발암물질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평소 사업장 내에서 측정된 발암물질 농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윤충식 교수는 “기업이 측정한 자료는 외부 기관에 비용을 지불해 얻은 데이터여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작업 환경과 작업량 등 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사업장 내 유해물질 농도를 측정하는 날은 연중 하루 이틀에 불과하다. 게다가 화학물질은 정상 작업보다 자그마한 누출이나 보수 작업에서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관한 데이터는 거의 없다. 심지어 기업은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측정된 데이터를 숨기기도 하고, 발암성을 제외한 화학물질 유해성 문서 보존 기간은 5년밖에 되지 않아 자료 자체가 소멸되기도 한다. 결국, 산재 신청서에는 근로자 진술만 남게 되고, 산재 인정의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에서 삼성 반도체 공장 근로자 백혈병 사건의 역학조사를 책임진 백도명 교수는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삼성이 그 전까지 제대로 된 사업장 안전성 평가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다가 백혈병 피해자가 속출한 뒤에서야 평가를 실시한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라며 “근로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크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업자와 근로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은 학계의 청부과학으로 이어진다. 삼성 반도체 공장 근로자 백혈병 사건이 발생하자, 삼성은 외국 안전보건 기관인 인바이론 사에 사업장 근무환경 평가를 요청했다. 인바이론 사는 삼성과 정부 측 자료만 사용해 데이터를 분석했고 삼성 사업장 내 화학물질과 근로자 백혈병은 관련이 없다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백도명 교수는 인바이론 사가 삼성의 불완전하고 편향된 자료를 토대로 수많은 유해물질 중 세 가지 물질만 분석했다며 학술지에 반박 논문을 게재했다. 백 교수는 “인바이론 사 논문은 완전 엉터리”라며 “학술지라고 하는 곳도 거짓을 걸러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산재 입증의 책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아왔다. 근로자가 사업장에서 직업병의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 근로자가 사업장에서 직업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내놓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충식 교수는 “지금까지는 기계론적 인과론에 입각해 근로자에게 질병이 발생하면 몇 가지 정해진 원인물질을 사업장에서 확인하는 데 그쳤다”며 “하나의 질병이 여러 물질에 노출된 뒤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해서라도 입증 책임을 사업장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실한 관리로 터진 가습기 참사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제품은 시장을 통해 소비자에게 도달한다. 정부는 법적으로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기업으로부터 안전성 평가 자료를 받는다. 그런데 현행 체계에서는 용도에 따라 제품 관리부처가 파편화돼 있다. 예를 들어, 기저귀와 생리대에 들어 있는 물질의 성분과 재질은 같은데 기저귀는 산업부에서, 생리대는 보건복지부에서 관리한다. 휴대용 산소캔, 코골이 방지제, 생리컵 같은 신규제품은 기존 관리 체계에 포함되지 못해 안전성 평가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최경호 교수는 “화학물질 관리 부처가 너무 많아 관리 사각지대가 존재해왔다”며 “부처마다 화학물질 독성을 관리할 수 있는 전문성이 다른데, 관리하고 싶은 제품이 있어도 자기 소관이 아니어서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현 제도로 관리되는 제품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화학물질 자체의 유해 수준과 제품 내 물질의 함량을 고려해 제품 안전 기준이 설정되는데, 중요해 보이는 물질의 독성 정보만 제출되고 특수한 노출 경로가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컨대 세탁기에 넣는 세제가 옷에 남아 피부로 들어올 가능성이 있음에도 피부 독성 정보는 제출되지 않는다. 최경호 교수는 “쌀에 들어 있는 비소 기준도 만들어진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며 “안전 기준으로 관리되는 제품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1월 발표된 환경부의 작년 하반기 생활화학제품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되던 10개 업체 18개 제품이 위해 우려 수준을 초과해 시장에서 퇴출됐다.

‘환경호르몬 제로’나 ‘친환경 제품’ 같은 기업의 선전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제품에는 제도상으로 환경호르몬이나 유해물질에 속하지 않지만 과학적으로 유사한 작용을 하는 물질이 사용된다. 미국에서는 남성 호르몬을 약화시킨다고 논란이 된 DEHP 사용량이 줄고 있는데, DEHP와 유사한 프탈레이트계 물질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비스페놀A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비스프리’ 제품이 국내 마트에 진열돼 있지만, 사실 비스페놀A 대체 물질이 사용된다. 김성균 교수는 “실제로 연구해보면 제품 사용자의 소변에서 새로운 비스페놀류 물질이 검출되고 있다”며 “독성 평가나 유해성 연구는 산업계에서 모르는 물질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화학물질이 우리 몸에 침투하지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전반적인 제품 관리 상황에서 역사상 최악의 생활화학물질 참사인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발생했다. 가습기살균제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발표 후 5년이 지난 작년 초에야 서울중앙지검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법적 해석과 과학적 해석에 충돌이 일었다. 질병관리본부의 CMIT/MIT 흡입 독성 동물실험 결과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검찰이 살균제 성분으로 문제가 된 PHMG, PGH, CMIT/MIT 세 물질 중 CMIT/MIT 계열사를 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리적으로는 검찰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계는 단 한 번의 실험이 CMIT/MIT의 무해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꾸준히 취해 왔다. 특정 쥐에게 특정한 양과 경로로 CMIT/MIT를 노출시킨 질병관리본부의 실험이 관련 계열사를 위한 면죄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입덧억제제로 사용되던 탈리도마이드가 쥐 실험에서는 통과됐지만, 임산부에게 기형아 출산을 유발해 큰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있다. 최경호 교수는 “특정 종에게 독성이 없으니까 사람에게 독성이 없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쥐한테 독성이 없으면 다른 생물로 독성의 가능성을 넓혀가면서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CMIT/MIT는 아니라고 제껴 놓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자세”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이는 CMIT/MIT 계열 제품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보상의 문을 열어둔 환경부의 정책과도 모순이다.

게다가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인체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서 실제 피해가 있음에도 피해자 선정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폐뿐만 아니라 피부, 안구, 혈액, 면역질환 등에서 다양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고, 학계도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 성분이 인체의 여러 기관에 폭넓은 영향을 준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구상권을 전제로 피해자를 등급화해 1, 2급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병원비와 장례비를 부분적으로 지급하고 있다. 김성균 교수는 “환경성 질환 자체가 역학조사를 해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폐 이외 질환이 함께 인정되지 않고 있는데 이를 더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엉성한 화평법, 개선은 언제?

여러 화학물질 참사가 불거지자 정부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제정했다. 국내 제조, 국외 수입 화학물질을 사전에 등록해 시작점부터 화학물질을 관리해보자는 것이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 의무만 있던 기존의 유해물질관리법과 달리, 화평법에서는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에도 등록 의무가 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시행된 화평법이 실질적으로 화학물질을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일단 ‘1톤 이상’이라는 조건 때문에 등록 대상이 되는 기존 물질은 510종에 불과하다. 여기에 속하는 물질이라도 여러 사업자 등록 번호를 만들어 990kg씩 10번에 걸쳐 등록 없이 유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톤수에 따라 유해성 평가 항목이 달라지기 때문에 1,000톤 이상 제조·수입·판매되는 화학물질만 46개의 유해성 항목에 대해 평가를 실시하고, 그보다 적은 양으로 유통되는 물질은 매우 기본적인 유해성 항목에 대해서만 평가를 실시한다. 실제로 화학물질 등록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한 A씨는 “화학물질 등록 업무를 맡으면서 기업이 관리망을 빠져나갈 방법을 주로 배웠다”며 “좋게 말하면 법률 자문인데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든 화학물질을 쓸 수 있게 컨설팅한 것”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밝혔다.

게다가 연구 목적의 화학물질은 등록에서 제외되는 점을 악용해 음성적으로 용도를 바꾸어 법망을 빠져나갈 구멍이 존재한다. 지우개에 들어있는 물질처럼 고체 상태의 화학물질은 사용자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등록에서 제외된다. 최경호 교수는 “산업계에서는 비용이 많이 든다며 불평하는데, 공동 등록 제도*를 활용하면 충분히 비용을 분담할 수 있다”며 “참사 이후 4만 4천 종의 화학물질에서 딱 외양간만 고쳤다”고 비판했다.

기업의 입김이 작용해 전반적으로 화학물질 관리 체계가 약화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학물질 관리 체계로 알려진 EU의 REACH 법안은 특허 침해라는 기업의 반발에도 유럽에 수입되는 제품 내 화학물질의 성분과 독성을 모두 밝혀왔다. 그러나 경제와 산업을 망친다는 지속적 반발로 EU도 이와 같은 기조를 바꿀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성균 교수는 “환경호르몬에 속하게 되면 규제가 심해지니, 유럽에서도 환경호르몬 자체가 매우 보수적으로 정의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기업의 로비와 기업 활동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한국 산업통상부의 태도로 화평법 자체가 많이 약해져 관리 체계를 다듬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꼬집었다. 이런 이유로 현재까지의 화학물질 관리 체계는 시민단체의 감시로 더디게 개선돼 왔다. 지난 13일(목) 열린 ‘2017 대선 캠프 초청 국민 생명안전 대토론회’에서 노동환경시민단체 ‘일과건강’ 현재순 기획국장은 “지역 사회 알 권리 조례 운동으로 20%만 공개되던 화학물질 정보가 95%까지 공개됐다”며 화학물질 관리 체계가 시민단체의 투쟁으로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학물질 참사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한 번 겪으면 죽는 것은 물론 평생 어려운 삶을 살거나 가정이 파괴된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이를 예방하려면 화학물질 독성 연구나 제도 개선 이외에도 화학물질을 바라보는 사회의 가치 구조나 분위기가 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표면적인 기술이나 법뿐만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는 하부의 가치와 의사소통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백도명 교수는 “지금까지는 화학물질 사고가 발생해도 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해 재발을 방지하는 과정을 끝까지 밟은 적이 없었다”며 “개발이나 성장, 상품화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대신,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CAS번호: 화학 구조가 알려진 물질에 부여하는 고유 번호. 미국화학회가 관리함.

*공동 등록 제도: 화평법에서 동일 화학물질을 등록해야 하는 구성원들이 함께 자료를 준비하고 비용을 분담하는 제도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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