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남역 살인, 그 후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경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노래방 건물의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사건의 범인은 2008년부터 조현병과 공황장애 등으로 수차례 입원한 전력이 있는 남성으로 밝혀졌으며, 그는 최근 재판에서 심신 상실 상태를 인정받지 못하고 징역 30년형을 확정받았다. 새벽에도 유동인구가 많아 위험할 리 없다고 여겨졌던 강남역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게다가 범인이 화장실에 숨어있는 동안 6명의 남성을 보내고 피해자가 들어오자 무참히 흉기를 휘둘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오프라인에서 피해자가 ‘여성’이기에 희생당했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었다. 이후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거졌다. 이에 『대학신문』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정부의 강남역 살인사건 재발 방지 대책안을 검토하고, 이 사건 이후 변화한 사회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물리적 안전에 초점 맞춘 정부의 종합대책

사건 발생 이후 십여 일이 지난 지난해 6월 1일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엔 범죄취약지역에 CCTV를 확충하고 신축건물에 남·여 화장실 분리설치를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사건이 벌어졌던 서초구청은 공중화장실에 CCTV와 비상벨을 갖춰 ‘여성안심화장실’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실제로 남녀공용 화장실이었던 피해 현장은 남녀분리 형태로 바뀌었고, 비상벨도 설치됐다. 하지만 대책이 적용되는 범위는 전체 화장실의 3%에 불과한 정부와 지자체 소유의 화장실이었고 사건 현장 근처의 시민들은 여전히 사건 이후 달라진 치안환경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약국에서 근무하는 A씨는 “사건 이후 달라진 점이 없다”며 정부의 치안 대책을 인지하지 못했다. 인근 카페 매니저 B씨는 “무서워서 화장실을 가급적 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치안 환경이 개선됐는지 여부를 넘어 종합대책 자체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사무처장은 “여성대상 범죄의 예방에 있어서 치안 인프라 구축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정부의 종합대책은 물리적 환경 개선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여성대상 범죄는 실상 밤낮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며 “범죄의 발생 장소와 상황을 특정하는 것은 ‘늦게 귀가하는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 조심하면 범죄를 피할 수 있다’는 그릇된 통념에서 비롯된 조치고, 이러한 정부의 정책이 그러한 통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1년 후, 천여 개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강남역 10번 출구의 모습

본질을 꿰뚫는 것이 대책의 첫걸음

사건 발생 초기 경찰은 범죄자가 정신질환자라는 점에 착안해 범죄 위험 소지가 있는 정신질환자를 판단하는 체크리스트를 도입하고, 경찰관이 의뢰하면 의학적 판단을 거쳐 지자체장이 정신질환자의 입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장애인계는 “조현병 환자의 범죄 위험성이 매우 낮은 현실과 괴리돼있으며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억압한다”고 즉각 반발했다. 이러한 경찰의 대책이 발표된 배경은 당시 경찰이 이를 “피해망상을 동반한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발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재발 방지대책은 사건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사건 직후, 이를 여성혐오 범죄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신체적 약자였던 여성을 희생자로 선택해 무작위 폭력을 가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범죄에 가깝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면 이 사건에서 여성혐오적 성격을 배제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김민정 씨(여성학 협동과정․박사과정16)는 “망상은 어떠한 정서가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인정될 때 생겨난다”며 “‘여성이 나를 무시했다’고 살해 동기를 밝힌 가해자의 망상과 여성혐오 정서는 분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 김희영 활동가는 “사실 혐오범죄는 한국 사회에서 정의내린 적이 없기 때문에 명명하기 애매하다”며 “여성혐오 범죄인지 여부를 떠나 수많은 여성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받아들이고 공포를 느꼈던 맥락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적 맥락에서 이 사건을 비춰봤을 때 정신질환자에 대한 제재와 물리적 안전에만 초점을 맞춘 정부의 대책은 본질에 닿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는 근본적인 젠더의식 고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송란희 사무처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차별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차별적 인식에서 기인한다”며 “강남역 살인사건의 근본적 대책은 성평등 정책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으로 성차별 및 여성 혐오 논의가 공론화되며 지난 4월 서울시는 ‘여성안심특별시 3.0’을 발표한 바 있다. 젠더감수성을 향상하는 조기 교육을 실시하고 성평등 이미지를 담은 이모티콘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의 방침을 통해 사회 전반에 성평등 가치를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천여 개의 포스트잇이 남긴 것

강남역 한복판에서 여성만이 범죄의 표적이 됐던 이 사건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바람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됐다. 다수의 여성이 “자신은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말하며 피해자의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으며,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내용의 포스트잇 1,000여 개가 붙었다. C씨(식품영양학과·16)는 “사건 이후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확 와 닿았고 ‘불편렌즈’를 끼게 됐다”며 “캣콜링을 당한 여자가 화내는 것을 ‘앙탈’이라고 말하는 것을 예전에는 그냥 넘겼지만, 지금은 상당히 불편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김희영 활동가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2~30대 여성들 중심으로 여성비하적인 묘사, 일상적인 언어에 대해 문제 제기와 공론화가 활발해진 것을 체감한다”고 덧붙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이어진 여성들의 ‘집단적 각성’은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김민정 씨는 “한국에서 과거 여성운동은 호주제 폐지 등 제도를 요구하는데 그쳤지만, 사건 이후 여성들은 본인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알아달라고 자유롭게 말하며 집단적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SNS상에서 해시태그 ‘#OO계_내_성폭력’과 함께 문단, 영화, 웹툰 등 문화계 권위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고발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해 9월에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진행한 의료인의 처벌을 강화하는 보건복지부의 입법예고안에 반발하며 검은 옷을 입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른바 ‘검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한국여성의전화 조재연 국장은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이 움직이고 있다”며 “여성 혐오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며 본 사건을 꾸준히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강승우 기자 kangsw0401@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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