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고 싶었습니다 | 여신동 무대 디자이너 겸 연출가

관객이 공연장에 들어서서 처음 마주하는 것은 무대다. 극이 시작되기 전 관객은 꾸며진 무대를 통해 이곳에 채워질 공연을 상상하며 극에 본격적으로 흡수될 준비를 한다. 무대는 이내 배우와 조명, 음악 등으로 채워지며 극 속의 ‘새로운 세계’로 탈바꿈한다. 이렇듯 무대는 공연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무대가 없다면 배우가 설 곳도 없으며, 작품도, 관객도 없다.

또 다른 세계인 ‘무대’를 만드는 이가 있다. 3,000회 이상 공연된 창작 뮤지컬 ‘빨래’로 이름을 알린 무대 디자이너 여신동이 그 주인공이다. 데뷔작을 올린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공연계에서 손에 꼽히는 무대 디자이너로 평가되는 여신동. 그의 작품 중 다수가 올려진 곳이자 소속 창작자로 활동했던 ‘작품의 고향’인 두산 아트센터에서 만난 여신동 씨는 기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무대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집을 짓는 건축가라고 생각하고요"

 

우연히 들어선 길, 천직이 되다

단지 미술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그가 무대 디자인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미술이 좋아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여신동 씨는 고등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대학은 작품에 자신만의 서사를 담을 수 있는 회화과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를 알게 됐고, 전문적인 예술가를 양성한다는 학교의 모토가 그의 마음을 끌었다. 하지만 당시 미술원이 없었던 한예종에 미술을 전공한 그가 입시를 치르고 입학할 수 있는 과는 연극원의 ‘무대 미술과’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우연히 무대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된 무대 디자이너의 길이기에 고민거리도 있었다. 학창시절 꿈꾼 적도 없던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 의문이 든 것이다. 여신동 씨는 “여느 대학생에게나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생겼고,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고민하며 ‘백수’로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렇게 방황하다 대학원으로 ‘도피’했지만 그는 배움의 목적을 가지고 진학한 것이 아니기에 회의를 느끼게 됐고, 이내 학업을 중단한 후 1년 동안 여행을 떠났다. 그는 “무대 디자이너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면 유명 무대 디자이너 밑에서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는 등의 쉬운 길을 택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무대 디자이너라는 정해진 틀 안에 자신을 가두기 싫어 먼 길을 돌고 돌았던 것 같다”고 당시의 복잡했던 심정을 회상했다. 여행에서 ‘나를 표현할 수단이 무대 디자인이 될 수도 있는데 이것을 왜 버리려고 하는가’라는 답을 얻게 된 그는, 귀국 후 선배의 제안으로 2009년 창작뮤지컬 ‘빨래’에 참여하게 되면서 마침내 무대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빨래’가 유명세를 타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여신동 씨는 후기작으로 성기웅 연출의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무대 디자인을 맡게 된다. 이 작품으로 2010년 연극계에서 권위 있는 상인 ‘동아연극상 무대미술가상’을 받으며 그는 마침내 공연계가 주목하는 ‘핫’한 무대 디자이너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만든 무대, 나를 만든 무대

무대 디자인은 무대 장치와 배경, 소품을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공연의 흐름을 제시하고 주제와 의미를 고안해내는 것까지 포함한다. 여신동 씨는 “무대 미술은 감각을 만드는 일”이라며 “감각을 통해 관객과 배우, 작품이 ‘리얼하게’ 만나게 하는 것이 무대 미술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빨래’의 경우 실제 재개발 지역에서 옷장, 문, 시계 등을 하나씩 모아 무대에 옮김으로써 사실감과 현장감을 살렸고, 창극 ‘메디아’에선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한 무대를 통해 자궁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담았다. 무대 미술은 이렇게 공연 예술의 시각적 해설자 역할을 함과 동시에 공연의 개념을 함축하고, 그 자체로 상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신동 씨는 “실제를 똑같이 무대에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감각에 집중하는 편”이라며 “길 가다 어느 냄새를 맡으면 그것과 관련된 한 켠의 추억이 떠오르듯이, 잊고 있던 감각을 재현해내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무대를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화’다. 그는 “‘자신의 색을 가진 것’과 ‘자신의 색을 고집하는 것’은 다르다”며 “좋은 디자이너는 싸움에서 이겨서 자기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과 타인의 것을 조화롭게 맞춰가며 협업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공연이란 연출의 의도와 무대를 만드는 아티스트들의 개성이 공존할 때 비로소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이 중심이 되기보단 극을 중심에 둔다. 이렇듯 10여 년 동안 꾸준히 ‘좋은 무대’에 대해 고민해온 여신동 씨는 공연계에서 무대와 공연을 온전히 이해한 무대 디자이너로 통하게 됐고, 공연계의 러브콜을 받음은 물론이고 관객들 또한 그를 믿고 공연을 보게 됐다.

 

무대에 올린 ‘실제의 나’

연간 20개 이상의 무대를 만들며 굵직한 공연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는 해를 거듭하며 점점 ‘꾼’이 돼가는 자신을 보게 됐다. 여신동 씨는 “많은 작품을 다루고 3년간 연달아 상을 받게 됐지만,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과연 상을 받을 만한 작업을 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며 “나 자체에 대한 평가로 받은 상이 아닌 단지 ‘재주’로만 받은 상이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기계가 되는 것 같았다”며 “예술가보단 기술가가 돼가고 있었다”며 당시의 복잡한 심정을 회상했다. 무대 디자이너라는 틀을 넘어 예술가로서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에 결핍을 느낀 것이다.

이런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신동 씨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2013년 선보인 그의 첫 연출 작품 ‘사보이 사우나’가 그것이다. 그는 “연극이라는 틀 안에서 고상해지고, 전문가가 돼 ‘스마트한 척’을 하는 자신을 보며 괴리감을 느꼈다”고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원초적이면서도 사회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 공간인 ‘공중목욕탕’을 배경으로 한 ‘사보이 사우나’는 당시 그의 상황을 대변한다. 여신동 씨는 “무대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면서 점차 사람들은 무대라는 단면만 보고 나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며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형용사를 붙이며 나를 정의했지만 나 자신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나를 정의하는 것이 낯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꼭 표현하고 싶었고, 그 첫 작품이 ‘사보이 사우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사보이 사우나’에 담긴 자신을 ‘고상하지 않고, 적나라하고,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무대 그 곳에도 사람이 산다

그는 ‘사보이 사우나’를 계기로 자신에게 경계를 두지 않고 여러 장르와 함께 협업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갔다. 연극으로 데뷔했지만 창극, 패션, 음악, 영화 등 수많은 장르와 협업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왔다. 그는 함께 작업했던 아티스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티스트로 작곡가 정재일을 꼽았다. 여신동 씨는 “정재일 씨의 독립적인 음악도 좋지만, 그의 음악은 누군가와 협업했을 때의 시너지가 매우 높다”며 “‘사보이 사우나’ 때 인연이 된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웃었다. 이어 그는 “협업을 통해 내가 한 곳에 고여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받는 느낌”이라며 “협업을 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세계는 하나의 무대’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무대 또한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여신동 씨는 ‘무대’라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무대를 만들어, 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다시 극으로 구현해낸다. 실제 세상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살아가듯, ‘무대’라는 세계에도 실제 사람들의 삶을 녹여내는 것이다. 그는 “한 소리꾼의 목소리가 무엇을 먹고, 얼마나 크게 말하느냐, 어떤 환경 속에 살아가느냐 등에 따라 결정되듯이 무대도 마찬가지”라며 삶이 사람, 그리고 예술가에게 끼치는 영향을 설명했다. 그는 무대에 관한 영감 또한 ‘사람’에서 얻는다. 여신동 씨는 “술 먹고 추태 부리던 찌질한 사랑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오는 영감과 쿨한 헤어짐을 겪은 사람에게서 오는 영감은 다르다”고 예를 들며 “작품이 막힐 때마다 사람을 만난다”고 말했다.

사람에게 받은 영감이 실제 작품이 되기도 했다. 국립극단이 올린 ‘비행청소년 KW4839’가 그것이다. 국립극단에서 주최하고 여신동 무대 디자이너가 진행을 맡은 ‘청소년예술가탐색전’이라는 워크샵이 그 작품의 시초다. 워크샵에서 여신동 무대 디자이너와 익명의 청소년 16명은 3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통분모를 찾아갔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비행청소년 KW4839’다. 여신동 씨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공항이나 터미널과 같이 어떤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장소에 모인다”며 “다른 곳에 가야 하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공항과 같은 그런 곳, 그 아이들이 꼭 공항에 모인 것 같았다”고 워크샵으로 시작한 공연의 모티브가 ‘공항’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우연으로 시작한 무대 디자이너의 길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점검한다는 그가 계속해서 무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에게 즐겁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탄생하는 공연예술’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예술이 발현되고,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그는 여러 세계를 만들었고, 원하던 대로 그 세계를 많은 이들과 공유했다. 경계를 짓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여신동. 이제 우리를 초대할 그의 다음 무대는 어떤 세계일까.

 

사진: 윤미강 기자 applesour@snu.kr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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