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인도의 발전경제학자 자야티 고시에 의하면 여성은 여성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때에도 언제나 노동자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시작부터 여성은 항상 노동계급의 일부였음을 지적한다. 물론 요리, 청소, 양육, 그리고 환자와 노인 돌보기 활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가 또한 지급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저출산과 관련한 두 가지 논란은 여전히 여성의 몸을 노동하는 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최근 행정자치부는 ‘지자체 저출산 극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역별로 가임기 여성 인구 수를 표시한 출산지도를 사이트에 게재했다. 뒤이어 보건사회연구원에서 개최한 저출산 관련 대책 포럼에서 한 연구원은 여성들의 고학력을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적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두 사례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의 몸이 인구 재생산의 도구로서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푸코의 ‘생명정치’는 다양한 인구를 분류해 생명을 위한 그들의 능력, 즉 생명을 자본에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을 말한다. 푸코는 이러한 인구의 정렬화된 배치(deployment)를 인종주의라고 기술한 바 있는데, 두 사례는 바로 이러한 인종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임기인 고학력 여성 중의 한 명으로서 나 역시 여러 이유로 분노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가임기가 아닌 여성들의 존재는 저출산이라는 위험인자와 관련한 인구집단 평가에서 제외돼 ‘죽음’으로 낙인 찍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노 치즈코가 말했던 생식용 여성과 쾌락용 여성의 이분법에선 자유의지로 생식하지 않는 여성의 존재는 상정되지 않으며, 실제 쾌락을 못 느끼는 여성의 존재 또한 상상하지 못한다. 자유의지에 따라 출산하지 않기로 혹은 출산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기로 선택한 여성들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고학력 여성의 생산 활동으로 창출될 수 있는 경제적 잉여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단 고학력 여성의 노동만 그러할까? 최근 한 문학평론가는 현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노동 혐오’ 현상을 탁월하게 분석했다. 일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스스로를 ‘노동자’로 부르기를 꺼려한다는 것. 이러한 ‘노동 혐오’는 국가권력이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남성들에게 노동 경험은 향수의 대상이지만, 여성들의 노동 경험은 은폐돼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어느 사회학 연구가 떠올랐다. 즉 여성들의 노동 경험은 제대로 발화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짧은 소견이긴 하지만 나는 ‘노동 혐오’ 이전에 여성 노동에 대한 혐오가 우선적으로 탐구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노동에 대한 혐오는 여성의 자기혐오까지 내포하고 있기에 더욱 문제적이다.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1973)는 1970년대 여성 노동자가 쾌락용 여성으로 형상화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자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 버스 차장으로 일하다가 버스 사고로 한 쪽 팔을 잃은 후 창녀가 된다. 그녀는 식모 시절 알고 지내던 창수와 만나 가까워진 후, 그와 함께 살 방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청량리 유곽 일대를 일제히 단속하겠다는 경찰의 방침에 따라 영자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유곽을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어느 날 창수는 유곽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서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외팔뚝이 시체를 발견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자의 사라진 한 쪽 팔보다 불을 지른 영자의 다른 팔을 상상했다. 사라진 한 쪽 팔에도 불구하고, 영자의 다른 팔은 노동을 하고, 사랑을 하고, 불을 질렀다. 영자의 사라진 한 쪽 팔의 의미에 집중하다보면, 영자가 노동하는 몸이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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