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 강사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나는 미국의 한 대학원에서 이집트학을 전공했다. 이집트학은 기원전 4000년경 출현한 고대 이집트의 역사, 문화, 언어, 종교, 예술 등을 종합적으로 배우는 학문이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기록문화를 연구하는 문헌학과 물질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발굴성과를 중시하는 고고학으로 세부 전공이 나뉘는데 나는 문헌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선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와 종교학과에서 고대 서아시아의 언어와 종교, 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5년째다.

한국에선 매년 22만 명이 국가공무원 9급 공채시험에 지원하고 이 중 21만 명이 떨어진다. 임금과 처우가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선 소위 ‘취업 완전체’가 돼 대학 입학 직후부터 영어 공부, 스펙 쌓기, 면접 연습에 전념해야 한다. 상황이 이런 만큼 대학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역시 취업률이다. 지난 4년간 학교를 오가며 대학과 그 구성원인 교수와 학생이 시장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지금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이 무슨 도움이 될까를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됐다. 지금은 사어가 돼버린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다가 수천 년 전 소멸해버린,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는 먼 나라 사람들의 삶이 분주한 일상에 지친 오늘날 학생들에게 도대체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커져갔다. 그리고 “자유로운 교양인의 육성이라는 대학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자” 운운하기엔 학생들과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엄중했다.

고심 끝에 얻은 답은 이렇다. 서아시아는 이집트를 비롯해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포괄하는 지명이다. 이 지역을 다르게 일컫는 ‘메소포타미아’가 ‘문명의 요람’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만큼 문명 생활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이 여기서 비롯됐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처음 농경이 시작됐으며, 기원전 4000년경부터 최초의 도시국가들이 건설됐고 기원전 3000년경 문자가 발명됐다. 이들이 이뤄 놓은 문명의 성취를 되돌아보면 지난 수천 년간 문명의 계승을 통해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종(種)적 심성은 또 얼마나 변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문명사 전체를 자유롭게 줌인·아웃 하면서 현대문명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제도와 도구, 발명품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길,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독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나는 이것이 고대 서아시아에서 명멸한 문명들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훈련을 통해 배양된 ‘낯설게 보기’는 지금 한국사회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도 힘이 될 수 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은 망각한 채 맹목적인 순종과 극단적인 효율성만 추구하며 결국 도덕적 파산을 맞은 상황에서 우리의 집단적 초상은 길을 잃고 미궁 앞에 선 초라한 영웅이다. 맑은 눈으로 문명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나침반은 사라지고 풍향계만 존재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은폐돼온 불합리한 요소를 그 공고한 보호색으로부터 구별해 낼 수 있는 비판적인 안목과 함께, 우리 모두 다시 여정을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잃어버린 실타래, 즉 역사적 방향감각을 되찾게 해줄 것이란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끝으로 학문의 즉물적인 효용을 끈질기게 묻는 물음 앞에서 또 다른 대답도 가능할 것 같다. 내 수업에 열정을 보인 학생들이 지나가며 하는 말 중 하나가, “지금 아니면 이런 공부를 언제 또 해보겠어요?”다. 이 말 속에서 나는 앞으로 세상에 부대끼며 돈의 화신이 돼 살아갈 학생들에게 내 과목이 질식 직전의 학문적 호기심을 살려줄 작은 숨구멍 하나가 되길 소망한다. 그들이 졸업 후에도 가끔은 환금성이 떨어지는 인문학 책을 펼쳐보게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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