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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실패,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위| 특집 | 러시아 혁명 100주년 기념 문화 혁명과 러시아 아방가르드

1917년 2월 굶주림을 견딜 수 없었던 러시아의 민중들은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사병들이 시위에 가담하고,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시위 진압을 위해 파견한 사병들이 진압을 거부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결국 황제가 폐위되면서 제정체제는 붕괴됐고,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지도력의 한계를 보이면서 민중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2월 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레닌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맞섰다. 마침내 레닌이 주도한 10월 혁명으로 인해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볼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다. 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자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파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뿐만 아니라 교육, 학문,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신원시주의, 광선주의, 입체 미래주의나 절대주의 등 혁명 전부터 성장해왔던 다양한 사조들의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예술계의 변혁을 포괄하는 개념이 러시아 아방가르드다. 한정숙 교수(서양사학과)는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예술계에서 변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가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초기 아방가르드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타틀린은 자신에게 10월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지는 없었다며 “내 온몸은 창조적이며 사회적이고 교훈적인 생활에 젖어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아방가르디스트들이 10월 혁명을 적극적으로 환영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레닌이 생각하는 문화혁명과 아방가르디스트들의 문화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한 교수는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예술이 현실의 재현이라고 보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레닌은 리얼리즘 예술을 확고하게 지향하고 있었고, 아방가르디스트들이 극좌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며 논쟁했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원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아방가르디스트들은 자국의 혁명에 동의해 혁명기의 삶과 예술을 융합하기 위해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거쳤다. 이들이 어떤 방법으로 삶과 예술을 결합시키려했는지, 혁명과 궤를 같이하며 그들의 실험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됐는지 살펴본다.

 

혁명을 삼켰는가, 혁명에 삼켜졌는가

 

현대에도 계속 논의되는 주제인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발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Vanguard’에서 유래한 말이다.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선발대처럼 아방가르드 예술도 기존의 근대예술을 반대편에 두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 돌진한다.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거부하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쓰이기 시작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러시아에서 혁신적인 실험을 진행했던 다양한 예술 사조를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변현태 교수(노어노문학과)는 “3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서유럽에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쓰였고 그 후 러시아의 문학, 예술영역 등에서 혁명적인 시도를 하는 예술 사조를 아방가르드라고 통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범주의 경우, 러시아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변 교수는 “부르주아 문화를 뛰어넘는 사회주의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더욱 실험적이고 구체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볼셰비키 혁명 전부터 마야콥스키, 말레비치 등 다양한 이들이 예술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말레비치의 대표적인 회화 ‘검은 사각형’, 마야콥스키의 저서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등은 기존 예술계를 뒤집어놓는 혁신이었다. 한정숙 교수는 “기존의 인습적인 취향이나 미학에 있어서의 전통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이 미술, 음악, 건축 등에서 다양하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겪으면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꿔나갔다. 변 교수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이 혁명을 겪으며 예술을 정치와 결합시키기 시작했고 공공연하게 사회주의의 선동이나 선전으로 나아갔다”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인 이젤화를 버리고 광고, 포스터, 상업 문구를 만들거나 현대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1920)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며 예술과 정치의 결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위)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1915) (아래)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1920)은 각각 혁명 전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말레비치는 특정한 대상을 형상화하는 기존 회화에서 벗어나 순수한 색과 모양만으로 구성하는 절대주의 회화의 극단을 보여줬으며, 타틀린은 단순한 작품으로서의 기념비를 넘어선 뉴스나 선언의 발표 연단으로서의 실용적 작품을 고안했다. / 사진출처: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웹사이트(검은 사각형), 뉴욕현대미술관 웹사이트(제3인터내셔널)

 

 

 

 

삶과 예술의 간극을 메우다

 

이처럼 사회주의 혁명에 동의하는 예술가들이 혁명과 예술 활동을 결합하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기존 형식을 파괴하는 것을 지향하는 데서 더 나아가 구축주의와 생산주의로 변화했다. 변현태 교수는 이에 대해 “예술과 삶의 경계를 없애고 둘의 결합을 지향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구축주의자와 생산주의자로서의 아방가르디스트들은 박물관, 이젤 등 기존 예술의 관습적 장소나 도구 등을 ‘삶을 장식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를 없애려했다. 그들은 예술이 제3자가 관람하고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에서의 예시로는 음악가 쇼스타코비치를 들 수 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밥을 먹고, 책도 읽는 등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이 실제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술이 삶과 분리돼 관조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음악가에게 있어서 진정한 음악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음악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피터 뷔르거는 이를 예술을 삶으로 가져와서 융합하려는 시도이자 예술은 예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예술의 자율성’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시도라고 말했다.

생산주의자들이 시도했던 ‘포토몽타주’도 예술과 삶을 융합시키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당시 보편적으로 쓰였던 표현기법인 콜라주*와 몽타주*는 예술에 삶을 등장시키기 위해 실제 물건을 작품 속으로 갖고 오는 기법이었다. 변 교수는 “넓게 보면 이는 삶과 예술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며 “신문, 광고 등 일상적인 삶을 대표했던 것들이 콜라주 재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물건의 형상과 그 속에 있는 문자는 결합되기 어려웠다. 변 교수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은 형상으로 재현되는 회화와 문자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 고민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문자를 콜라주 하지 않고 그대로 쓰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림이나 사진에 문자가 그대로 들어가면서 이는 포스터 작업으로 이어졌다. 예술을 더 이상 현실의 장식으로 보지 않고 현실 그 자체로 만들려는 아방가르디스트들에게 대중들의 삶을 바꾸기 위한 선전이나 선동의 대표적 장르인 포스터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특히 포스터의 대중성은 난해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중의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아방가르드의 난해성을 드러내는 예시 중 하나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던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작품이다. 몽타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가 만들어낸 영화 <전함 포템킨>은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이었다. 특히 ‘오데사의 계단’이라 일컬어지는 장면은 혁신적인 몽타주 기법으로 당시 지식인들을 열광시켰다. 총을 쏘는 군인, 겁에 질린 민간인들의 얼굴을 교차시키면서 조성된 긴장감은 어머니가 죽으면서 놓친 유모차가 계단을 따라 아래로 굴러가면서 절정에 치달으며 비극성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전함 포템킨>이 상영될 당시, 4주 정도 상영했음에도 관객은 7만여 명에 불과했다. 대중들은 대신 동시 상영됐던 미국의 서부극을 보러 영화관에 몰려갔다. 이는 대중의 입장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이 난해하며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방가르디스트들은 대중들이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예술을 만들려고 했고, 이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 포스터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대표적 예술가인 구스타프 클러티스의 1930년작 포토몽타주 작품들이다. 러시아에서 포토몽타주의 출발은 사회주의 이념의 선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아방가르디스트들은 레닌을 피사체로 많이 사용했다. 포스터 가운데에 레닌을 배치하고 그 주위로 문자를 나열하면서 혁명의 지도자로서의 레닌을 강조할 수 있었다. / 사진출처: 뉴욕현대미술관 웹사이트

 

끝내 혁명에 잡아먹히다

 

그러나 예술과 삶을 합치시키려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몰락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관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억압하지 않았던 레닌과 달리, 레닌 사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예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정숙 교수는 “스탈린의 예술적 취향은 고지식하고 보수적이었다”며 “아방가르드계 음악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 대해 대중이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겠냐며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이 선호했던 예술 원칙은 아방가르드가 추구했던 혁신성과는 달랐다. 그가 선언한 예술 원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민중들이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우선시했다. 변현태 교수는 “스탈린의 예술 원칙에 따르면 일반 민중들이 작품을 보고 사회주의 이념뿐만 아니라 미적인 것도 느낄 수 있어야 했다”며 “난해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이런 민중성의 원칙에서 어긋났다”고 설명했다. 스탈린주의와 불화를 빚기 시작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 원칙으로 선포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몰락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변 교수는 “당시 구축주의자, 생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결합하면서 자신들을 사회주의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여겼다”고 말했다. 스스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도구가 되면서, 그들이 걸어온 길이 당 정책이 바뀜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통합된 것이다. 더 나아가 학자 보리스 그로이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스탈린주의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실제 실행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아방가르디스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미학적 기획의 통일성이었지, 그것이 미학의 정치화(아방가르드)에 의해서 달성되느냐 혹은 정치의 미학화(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해서 달성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 교수는 스탈린이 아방가르드의 계승자이자 실행자라는 주장은 “아직까지 학계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다”며 “아방가르드가 스탈린 체제의 정치적인 희생자”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몰락은 혁신적인 아방가르디스트들과 보수적인 스탈린주의자의 양립불가능성에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혁신성과 창의성은 성공했다. 현대에도 쓰이는 액션 페인팅, 자동기술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러시아 아방가르디스트들에 의해 실험됐다. 그러나 예술의 측면에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곧 실패였다. 근대 예술의 자율성 개념을 깨뜨리고 싶어 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예술적 공간이자,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을 배격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가 성공하면서 그들의 작품은 다시 박물관에 전시됐다.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꿈꾼 소비에트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보다 하등한 단계로 여겨졌던 자본주의의 틀에 갇힌 것처럼 아방가르드 또한 근대예술에서 벗어나고자 한 시도는 실패했고, 그 안에 갇혀버렸다.

 

*콜라주 : 일상적인 삶을 작품 내로 등장시키기 위해 신문, 인쇄물, 사진 등을 화면에 오려붙이는 근대 예술

*몽타주 : 다르게 촬영한 화면들의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는 영화나 사진 편집 구성 기법

이현정 기자  hyundog96@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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