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국
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대학에 오기 전까지 나의 신분은 항상 ‘학생’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을 배우고, 잘 하지 못하던 것을 연습해서 성장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오고 나서 공부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 한번쯤 가보고 싶던 곳으로 여행을 떠났고, 꿈만 꾸던 고사양 컴퓨터를 장만해 게임도 실컷 하고, 드럼을 배워 공연에도 서고, 락 페스티벌에 가서 신나게 뛰어놀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여전히 즐거웠지만, 공부 이외에도 신경 쓸 것이 많이 생겼다.

2012년 대선 경선 당시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은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피땀 흘려 일궈놓은 풍요 속에서 이제 우리는 저녁에는 업무를 멈추고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우리는 업무가 쌓여 있어도 근무 시간이 끝나면 멈추고 퇴근하는 유럽의 직장인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에게도 저녁에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그 즈음의 나는 최대의 효율로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일이 삶을 무너뜨리지 않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우리 연구실은 9시 반부터 6시 반까지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반적인 직장의 근무시간과 비슷하다. 게다가 월급도 받고,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도 해야 하니 학부 때와 비교하면 직장인이 된 것 같다. 연구하는 것이 주업무인 직장인 말이다. 연구를 하는 것을 일로 생각하기 시작하니, 정해진 근무시간 이외에는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연구실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연구를 하되, 정해진 근무 시간이 지나면 일을 멈추고 ‘힐링’하는 것이 내가 이 일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힘을 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대학원에 오고 난 후엔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실험실에 도착해 실험을 하고, 실험 계획을 세우고, 논문을 읽다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조금 쉬면 아니 벌써, 자야 할 시간이다. 하루 종일 뭔가 하긴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한 달, 두 달이 훌쩍 지나있다. 자꾸 조급해진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내가 대체 언제쯤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의 웰빙을 위해서 저녁시간에 쉬는 것은 너무 사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저녁에 데이트 한 번 덜하고, 인터넷 쇼핑하는 시간을 좀 줄여서 논문을 한 편이라도 더 읽어야 더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든다.

때로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나와 비슷하게 일과 삶의 균형 속에서 고뇌할 우리 시대 청년들이 안타깝다. 하지만 경쟁이 줄어든 사회가 된다 해도 발전과 성공을 향한 개인의 욕망,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든다. 더 잘 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스트레스를 나를 발전하게 하는 건강한 자극제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날 위하는 일일까.

어찌됐든 나는 생물학 공부가 좋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흔히 말하는 ‘생명의 신비’가 나에게는 정말 강렬하게 다가왔고, 생명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왔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구를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삶’이라 생각해 보자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최용국

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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