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당연한 사회다. 뭐가 그리도 당연한 것인지 대선후보였던 누군가는 여성은 집에서 설거지나 하는 것이,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는 색출해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단다. 우리 서울대는 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에게는 중징계를 내려 학생들의 반발을 뿌리 뽑는 것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에는 차별 아닌 차별을 두는 것이, 총장의 권한은 권력으로 행사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단다. 모든 비이성적인 것들이 그저 ‘당연한 것’이라는 완전무결한 비논리로 정당화되는 것이 당연한, 그야말로 ‘당연사회’다.
반성하자면 나 역시도 당연함의 기제에 매몰된 생각만을 할 때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우리 고등학교 기숙사에는 ‘삼보일배’(三步一拜)의 전통이 있다. 삼보일배는 본래 세 걸음마다 한 번의 절을 행하는 불교의 수행법을 의미하는데, 전통 명문 사학인 우리 학교에서는 기숙사 선배와 마주치면 세 걸음에 한 번 이상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야만적이면서도 비이성적인 규율이었지만 누구도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앞장서지는 않았다.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후배들에겐 “우리 때도 그랬고, 원래 그런 것”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을 뿐이다. 나 역시 학년이 올라갈수록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관습에 물들어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을 점차 외면했고, 3학년이 됐을 때는 그저 ‘버텼기에 보장됐던 당연한 권력’의 맛에 한껏 취해 있었다.
이번엔 2년 전의 『대학신문』이야기다.『대학신문』에는 막 정기자로 발령받은 기자들이 다른 『대학신문』 구성원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 신문을 만든 후, 구성원에게 이를 판매해 해당 기수만의 기금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 문제는 이를 만들어 판매하는 과정에서 다른 구성원들은 이를 구매하는 대가로 ‘본인을 웃겨라’ ‘춤을 춰라’ 등의 민망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요구를 절대 하지 않지만 지난 수년간 ‘이제까지 그래왔다’ ‘선배 기자들은 다 극복해냈다’는 당연함을 근거로 이같은 관습이 당연하게 행해졌다. 몇몇 기자들은 수치심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이런 관습에 실망해 『대학신문』을 떠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과제가 통과되기 전까지 수습기자들은 새벽까지도 퇴근할 수 없었고, 수많은 절차와 회의는 그간 ‘당연히 그렇게 해왔다’는 이유로 개선되지 않았다.
위 사례들의 당연함에는 어떠한 타당한 근거도 없다. 본디 ‘당연하다’라는 말이 서로 간에 인정되기 위해서는 당연함의 근거에 대한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 일일이 근거를 제시하며 설득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바로 ‘당연하다’는 수사다. 하지만 위의 예시는 그저 ‘예전부터 그랬다’는 일방적인 강요가 이유의 전부다. ‘예전부터 그랬다’는 말 속에는 ‘예전부터 그래왔으며, 나는 이를 잘 견뎌냈고, 지금 돌이켜보면 이 당연함은 어떠한 타당함에 기반한다’라는 자조적인 합리화가 담겨있을 뿐이다. 이는 당연함에 의문을 갖고 반발하고자 하는 변화의 추동에 족쇄를 채우며,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의 발전을 막는다. 합리적인 근거를 통해 반발하더라도 그저 ‘당연한 것’이라는 완전무결한 비논리로 방어될 뿐이다.
변화는 이런 당연함의 강요에 대한 끝없는 의문과 반발로부터 비롯된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당연하다는, 이성애가 당연하다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에는 차별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는 틀에 박힌 당연성에 반발하는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다.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관습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식적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변화를 이끌어낸다. ‘변화가 그간 유지돼온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적폐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촛불의 힘으로 정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누군가에겐 ‘불편한’ 반발이 사회를 변화시켰듯 말이다.
혹시 요즘의 변화들이 불편한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런 불편함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