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로 이해된다. 어떤 사람은 고대 그리스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장으로 사용됐던 아크로폴리스를 떠올린다. 여의도 5·16 광장의 관제시위처럼 광장이 정치적인 행사를 위해 사용됐던 굴욕의 역사를 회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의 변혁을 외치던 수많은 사람의 피를 머금은 장소 역시 광장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한 광장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번 촛불 집회를 통해 ‘광장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다시금 떠오른 지금, 『대학신문』 취재기자와 사진기자가 동행해 네 곳의 광장을 돌아보고 당시 광장을 빼곡히 채웠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더불어 리포토그래피 기법*을 이용해과거 현장의 모습을 현재의 프레임에 담아냈다.

전태일 분신사건, 평화시장

- 분신으로 얻어낸 발언권

평화시장 앞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전태일 다리에는 고 전태일 열사의 흉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근로노동 환경 개선을 외쳤던 전태일의 혼을 담은 듯, 동상은 다리 위를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굳건히 서서 광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전태일이 화염에 뒤덮인 채 쓰러졌던 그 자리를 ‘전태일 재단’ 박계현 사무총장과 함께 찾았다. 평화시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동대문 종합상가를 가리키며 “옛날에 종합상가에서 모든 종류의 원단을 다뤘기 때문에 평화시장이 가장 큰 옷 시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북적였던 과거가 무색하게 그 날 평화시장은 꽤 한산했다.

평화로운 현재와 달리 과거 평화시장은 비정하고 불합리한 곳이었다. 노동자들이 과중한 업무와 비위생적인 작업환경으로 병에 걸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노동청에 고발했지만 묵살당했다. 이에 그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피켓 시위를 준비했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 사무총장은 “전태일의 일기에 ‘근로기준법에 한자가 너무 많아 읽기가 어려우니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쓴 내용이 알려지자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 계층이 각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많은 대학생이 그를 추모했으며 심지어 어떤 대학생들은 노동운동을 위해 학력을 낮춰 위장 취업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죽음 이후 있었던 7대 대선에서는 당시 후보였던 박정희와 김대중이 노동환경 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정치권도 노동자들의 삶에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화시장에 변화가 바로 찾아오진 않았다.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한 건 그의 죽음에 각성한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게 된 박 씨의 노동환경 역시 열악했다. 그는 “한 달에 두 번, 첫째 주와 셋째 주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다”며 “기념일이 있는 달에는 한 달 반 전부터 일요일 휴무도 없이, 추가수당도 없이 밤새 일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노동조합에 들어간 박 씨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환풍기가 설치되고 노동시간도 오후 8시까지로 제한됐으며, 일요일은 무조건 쉬도록 개선됐다. 박 씨는 “사측이 근로시간에 대한 합의를 안 지키는 경우가 많아 8시가 되면 노조에서 전기 스위치를 내려버렸다”며 각성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담대해졌다고 말했다.

평화시장 앞에는 전태일의 흉상이 서 있다. 그 앞에 꽃을 건네고 묵념하는 시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박 씨도 가끔 이곳의 동상을 보며 마음가짐을 다잡는다. 소수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분신, 전태일의 희생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박 씨는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 희망이 없던 자신에게 노동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줬다”며 “노동운동은 굉장한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고 밝혔다.

'전태일 재단' 박계현 사무총장

광주민주화운동, 구 전남도청

- 죽음의 공포에 맞서 광장에 모이다

기자는 맞은편 전일빌딩 옥상에서 80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도청 앞 광장을 바라봤다.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변모한 구 전남도청은 과거 모습을 일부 잃어 현재 별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한 어느 봄날,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에서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수다를 떠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사람들이 한적한 공터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는 봄이 완연했다. 이날 ‘5·18 구속부상자회’의 김공휴 씨는 과거 이곳에서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그날도 이렇게 날씨는 맑았다”며 총성이 울려 퍼지고 피가 사방을 뒤덮었던 그 때를 회상했다.

1980년 5월 18일,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번화가로 가던 중 전남도청 앞에 사람들이 모여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호기심에 군중 속에 서 있었던 그를 갑자기 무장한 군인이 차도로 끌고 가 군화로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구타했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빨갱이 짓을 한다”는 군인을 향해 그는 학생이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한 마음에 다음 날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는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계엄을 확대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월 21일, 폭력진압에 대응해 시민들은 다시금 도청 앞으로 모였다. 도청으로 진입하려는 시민들과 도청을 장악한 계엄군이 대치하던 중 계엄군은 비무장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집단발포를 행했다. 김 씨는 “당시 시위 인파의 앞쪽에 서 있었는데, 바로 양옆의 사람들이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며 “너무 충격적인 광경에 혼이 나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있었다”고 회상했다. 총성이 멈춘 후 사람들의 함성에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그의 주변은 이미 피와 시체로 난장판이 돼 있었다. 가까스로 생존한 시민들에게 무장은 불가피했다. 시민들이 각종 방법으로 무기를 확보하자 계엄군은 도시 외곽으로 퇴각했고, 이에 시민들은 도청을 거점으로 삼아 항쟁을 계속해나갔다. 김 씨 역시 이때부터 전남도청에서 하루 종일 기거하며 광주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 도청에 들어간 지 6일째 되던 날,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다시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소문이 퍼진 그 날 목숨을 바쳐서 도청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선서를 하고 기동타격대에 합류했다”며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자며 도청을 나갔던 사람들도 혼자만 살 수 없다고 도청에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27일 시내로 돌아온 계엄군에 에워 쌓였다. 김 씨는 “계엄군이 타고 온 탱크가 도청을 포위했고 도청 앞 전일빌딩에 있던 계엄군은 공포에 질린 채 도청 정문 밖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을 무참히 총살했다”며 그날의 끔찍했던 상황을 묘사했다. 결국 그는 27일 새벽 도청에 침입한 계엄군에 의해 연행돼 징역 5개월을 선고받았다.

1980년 끔찍했던 5월, 광주 시민들은 고립된 도청에서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는 “교통이 통제되고 언론에서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모는 사이 광주 시민들은 총에 맞아 죽어갔다”며 군부의 만행에 대해 말했다. 당시 그들에게 전남도청이라는 광장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지켜내야만 했던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5.18 구속부상자회' 김공휴 씨

6월 민주항쟁, 명동성당

- 넓어진 광장, 시민은 연대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은 학생·시민들이 집결했던 광장민주주의의 현장이었다. 명동성당에 이르는 계단에 모여 비폭력 시위농성을 결의한 과거 그날의 사진과 달리 기자가 방문한 오늘날의 명동성당은 한산했다.

올해로 6월 민주항쟁이 30주년을 맞는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 그리고 이한열의 죽음으로 인해 6월 민주항쟁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항쟁에 앞장섰던 연세대 86학번 김정희 씨는 이제 중년이 됐다.

김 씨는 6월 민주항쟁이 집회의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했다. 6월 민주항쟁 이전 전두환 정부는 학생들의 과격함과 폭력성을 부각했고, 이에 여론도 학생운동에 부정적이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은 과격한 구호를 외치거나 폭력 대응을 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은 돌이나 각목을 절대 시위에 들고 나오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대응에 힘입어 일부 학생들에게만 국한되던 학생운동이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갔다. 그는 “6월 민주항쟁 때는 화려하게 꾸민 학생들이나 하얀 가운을 입은 의치대생 등 많은 학생들이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학생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역시 달라졌다. 김 씨는 “이전에는 상인들이 학생들의 시위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며 싫어했지만 6월 민주항쟁 당시에는 학생들을 가게에 숨겨주기도 하고, 음료수나 음식을 갖다 주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반 시민들도 “죄 없는 학생을 왜 끌고 가냐”면서 전경을 방해해 연행을 막아주기도 했다. 김 씨는 “학생운동에 강경하게 반대하셨던 부모님께서도 한열이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만은 허락해주셨다”고 말했다.

명동성당은 집회참여의 주를 이루던 학생들과 시민들과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6월 10일 열렸던 집회에서 시민들은 전경과 치열하게 대치하다 최루탄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이후 전경이 명동성당을 에워싸자 시민들은 그 안에 꼼짝 없이 갇혔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구급품도, 당장 먹을 음식도 없는 이들에게 시민들의 구호품이 쏟아졌다. 명동 인근의 계성여고 학생들은 부모님께 두 개의 도시락을 부탁해 명동의 시위자들에게 몰래 나눠주기도 했다. 결국 5박 6일의 대치 끝에 시위자들의 자발적 해산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 씨는 “신부님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있는 이들을 해산시킬 테니 연행하지 말아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며 “모인 사람들은 신부님들이 집까지 동행해 안전히 귀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을 통해 국민들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낼 수 있었다. 6월 민주항쟁에서 광장은 더 이상 김 씨와 같은 ‘운동권 학생’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확장된 광장은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 각각을 연결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1987년, 광장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사무국원 김정희 씨

광화문 촛불집회, 광화문 광장

- 광장, 다양성을 품다

지난 4월 11일(토) 광화문 광장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인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모였다면, 08년 광장에는 광우병 파문에 놀라고 분노한 시민들이 집결했다. 과거와 현재 모두 광장에는 붉은 피켓을 든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9일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선이 있었다. 이는 매주 토요일 밤 마다 대통령의 탄핵과 적폐청산을 요구하던 시민들이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촛불집회를 선두에서 이끌어갔던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박진 공동상황실장을 만났다. 박 실장은 다산인권센터에서 사람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일해 왔다. 그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누구도 위임하지 않았던 권력으로부터 자의적 통치를 받은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퇴진행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총 23회의 촛불집회에는 합산 1,700만여 명의 시민들이 나와 함께 촛불을 밝혔다. 박 실장은 “아주 어두울 때는 촛불 하나가 굉장히 큰 빛을 발하고, 연약하지만 함께 모여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며 “대한민국 시민의 정체성도 촛불과 같다”고 설명했다. 과거 여중생 미군장갑차 압사사고에 대한 추모 집회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2008년 한미 FTA 반대집회를 거쳐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청와대 앞까지 도달했음에도 그 어떤 폭력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만큼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는 “시민들의 평화적인 집회로 권력이 교체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유례없는 사건”이라고 평하며 “공권력이 강압적으로 막지 않으니 그 어떤 국가적 위협이나 폭력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권력이 없고 언론도 조명하지 않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집회”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집회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바로잡고 그 순기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촛불집회가 이뤄졌던 광화문 광장에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요구가 어우러졌다. 광장에서 시민들은 모두가 하나의 구호만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노동탄압 금지, 국정교과서 폐기,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표출했다. 그는 “시민들은 광장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잘 알지 못했던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고 배운다”고 말했다. 이제 시민은 광장 안의 군중 속 일부를 넘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개별적인 한 주체가 됐다. 굴곡진 한국 근대사에서 광장은 변화하는 중이다. 그는 “광장에서 말하기 위해 광주에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고, 6월 민주항쟁에 나온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포기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자신의 요구를 가감 없이 보여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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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에게 집회는 불편한 존재였다. 권력에 쓴 소리를 가하는 시민들의 집회는 공권력에 의해 방해받은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치열한 집회의 중심은 항상 광장이었다. 평화시장, 구 전남도청, 명동성당, 그리고 현재의 광화문까지. 우리의 광장은 투쟁의 역사를 거쳐 시민의 목소리를 내는 창구로 성장해왔다. 광장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묵살하지 않는 나라,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가 향해야 할 방향이다.

⁎리포토그래피 기법: 과거의 사진을 현재의 같은 장소와 겹쳐 찍는 사진 촬영기법

⁎흑백 처리된 사진 부분은 「중앙일보」와 「연합뉴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사진: 윤미강 기자 applesour@snu.kr

삽화: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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