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 | 광화문 ‘광장극장 블랙텐트’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안 한다. 예스, 노. 어느 게 맞아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7차 청문회’에서 나온 이용주 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대답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조윤선 당시 정무수석은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지시하에 약 만 명의 예술인들의 이름이 적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국공립극장들은 세월호 희생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위안부’ 등 사회가 함께 나눠야 할 이야기들을 외면했다. 예술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마음껏 내야 할 ‘극장’을 뺏겼고 사회의 주목을 받아야 했던 이야기들은 ‘음소거’ 된 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2017년 1월 7일, 약 70명의 예술가, 해고노동자,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대항해 광화문광장에 임시 공공극장인 ‘광장극장 블랙텐트'를 세웠다.

추운 겨울 아침 7시, 이순신 동상 뒤편에 폭 8m, 길이 18m, 높이 5.5m의 대형 철골 구조물이 세워졌다. 이 구조물에는 블랙리스트를 의미하는 검은 천막이 덮였고 ‘블랙텐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약 70여 명의 연극인, 기륭전자·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시민들은 뺏긴 극장과 지워진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텐트를 세우는 작업에 참여했다. ‘변방연극제’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했던 임인자 운영위원은 “블랙텐트의 예술인들은 청산해야 할 과제들이 눈앞에 실체를 드러낸 상황에서 연극과 행동을 병행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고, 결국 텐트를 세우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배우 홍예원 씨는 블랙텐트의 구성원에 대해 “운영과정에서 특정한 역할이 분담됐다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하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됐다”며 “연극계 검열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사건들을 함께 겪으면서 연대, 결집했고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고 설명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밤9시에도 광장극장 블랙텐트는 광화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이들에게 블랙텐트는 연극의 공공성, 예술의 공공성, 극장의 공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여기, 공공극장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블랙텐트는 연극, 영화, 무용 등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통해 지워진 목소리와 추방된 이야기를 불러들이고자 한다. 출범 당시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이 결정되는 그 날까지 텐트를 지킬 것이라고 밝혀왔기에 한겨울의 살을 에는 칼바람도 이들의 공연을 막지 못했다.

텐트가 세워진 후 약 3개월간 이들은 ‘위안부’, 세월호 희생자, 해고 노동자 등 배제되고 외면당해 고통받는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때로는 연극으로, 때로는 무용으로, 수많은 방식을 통해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표현했다. 1월 10일 개관식을 시작으로 그간 두 차례의 시즌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10일 탄핵선고를 앞두고는 6일부터 9일까지 매일 밤 광장극장 페스티벌 ‘봄이온다’를 개최했다. 이번 페스티벌은 완벽한 오픈형 프로그램이었다. 예술인들에게 먼저 공연을 제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페스티벌 참가공지를 올리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직접 찾아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공극장’의 정신에 따라 모든 공연은 예약과 티켓판매가 없었고, 시민들의 후원으로 마련한 난방기와 담요는 찾아온 관객들의 몸과 마음에 온기를 더했다. 꽃샘추위 속 진행된 낭독극 ‘우리 시대의 연인’의 무대에 오른 배우들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에선 입김이 났지만 이들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블랙텐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멀리서 공연을 보러 왔다는 김영운 씨(31)는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관심을 갖고 공연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작은 참여가 블랙텐트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블랙텐트에 목소리를 더했다.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안이 인용됐고 광장극장 블랙텐트는 127일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의 사퇴 등 탄핵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것들은 남아있다. 임인자 운영위원은 “탄핵 이후 대선국면으로 전환됐을 때 연극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어떤 새로운 대안과 시스템을 제안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예원 씨는 “앞으로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바람이 있진 않다”며 “이 논의는 예술인들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블랙텐트를 세운 이들은 우리 사회엔 다양한 방법론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세상을 구분하는 방식보단 구분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방식을 예술을 통해 제안하고 있다.

홍예원 씨는 “블랙텐트가 세워지기 이전, 연극인들에게 연극과 삶은 분리돼 있었지만 광장극장 블랙텐트를 계기로 삶과 연극이 만났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분출됐고 이 에너지가 무엇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임시극장이 사라지고 블랙텐트를 세웠던 이들이 각자의 극장에 돌아가도 블랙텐트의 정신과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터전, 그들의 극장을 되찾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뎌야 할 때다. 누군가 빼앗긴 극장에 봄이 오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겨울이 가면 봄은 반드시 온다고 답한다. 추운 겨울을 견딘 봄은 더 활짝 필 것이다. 온다, 온다, 봄이 온다.

사진: 윤미강 기자 applesour@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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