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 | 총문학연구회 ‘조연호 시 세미나’ 발제문

오랜만이군요. 이런저런 세상사에 치이다 보니 당신과의 만남도 잊은 채 어느새 한 해를 소일했습니다. 당신을 지운 계절들을 보내고 다시 맞는 이 겨울에 저는 난방이 잘 안 돼 추운 방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작년 이맘 쯤 당신에게 조연호의 시를 몇 편 추려 읽어주던 기억을 떠올려냈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시간」으로 시작했던 그 때의 시선(詩選)은 조연호의 특징을 알아보는 데 가장 알맞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 차원에서의 이야기라는 것을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문법을 즐겨 써온 조연호의 문장들은 그에 익숙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당황케 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형식론에 치우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뒤늦은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의 저 역시도 그의 낯선 문장을 해석해보는 데 여념이 없었으므로 당신에게 읽어주었던 시들 역시 그의 글들 가운데서도 가장 낯선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낭송이 끝나고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위해서 시인에게는 기존의 언어 체계를 벗어난 새로운 문법이 필요했음을 역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조심스레 되물으셨지요.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시인의 문체 사이에 어떤 인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 인과가 규명되지 않는 이상, 모든 시인이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하려 노력하고 이를 뒷받침할 자신만의 문체를 확립하려 애쓰는데, 대체 조연호가 가지는 특수성은 무어냐고 말입니다. 만약 별다른 인과 없이 순전히 형식만을 위한 문체가 조연호의 문장이었다면, 그것은 기실 독자의 눈에 들기 위한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당신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드는 서쪽에 사람으로 구더기였음을 두고

할아버지들은 돌아간다 떨어진 씨앗이 내게 막대를 꿰던 날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적」 중

가령 위의 시에서 등장하는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라는 시구가 ̒적̓이라는 단 하나의 한자에 응집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도 당신이 품었던 회의와 그 결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잠시 뒤로 미루고자 합니다. 시인이 사용하는 의미의 응집 등이 단지 형식론에만 근거하지 않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까지의 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덩굴손이 붙잡는 것을 윤회의 크기라고 생각하며

네가 흔든 것을 내가 흔들렸던 것으로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하며

너를 잊고 있다

-「여름」 부분

방랑이 죽은 벽을 본 적이 없다

감정이 있어야 할 곳에 때수건을 걸었다

대를 이어 증오를 탕진하는 눈보라처럼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육사의 완(梡)」 중

조연호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을 텝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시작점이 결국 세계관의 가장자리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저는 조연호의 시풍과 가장 거리가 먼 위의 두 시를 이번 시선의 서시(序詩)로 삼고 싶습니다. 조연호의 시에 익숙해진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의 문장은 언제나 절제된 어조를 유지해왔습니다. 따라서 웬만한 감정표현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설령 드러나더라도 ‘나’라는 화자를 통해 발화되기보다 추상 명사 등을 통해 간접발화 되는 특징을 보였지요. 하지만 위의 두 시는 보기 드물게 ‘나’라는 구체적인 화자를 설정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화자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눈에 띠는 점은 두 시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감정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여름」에서 시인은 ‘덩굴손’으로 비유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윤회의 크기’로 인식하며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자운동을 ‘너를 잊고 있다’는 행위로까지 발전시킵니다. 여름날, 흔들리는 그네의 이미지를 ‘추락하는 여름’ 혹은 ‘낭떠러지 여름’으로 비유하고, 이 추락과 상승의 반복적인 이미지를 ‘윤회’와 연결 지어 그 안에서는 피아(彼我)의 구분조차 무용해진다는 사실을 ‘네가 흔든 것을 내가 흔들렸던 것으로 비교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진술을 통해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다분히 허무주의적인 이런 시선은 두 번째 시인「사육사의 완(梡)」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를 이어 증오를 탕진’하듯 ‘감정이 있어야 할 곳에 때수건’을 걸었음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부끄러움의 정서가 만연하던 20세기 초반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라는 고백 뒤에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는 선언으로 극복의 의지를 다졌던 미당의 「자화상」을 현대적인 판본으로 읽는 듯합니다.

시인이 보여주었던 허무를 넘어선 초연(超然) 이외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직설적인 문장에 앞서 제시된 ‘방랑이 죽은 벽을 본 적이 없다’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 시구의 의뭉스러움은 벽(壁)과 벽(癖) 사이의 언어유희를 통해 극대화됩니다. ‘방랑벽(癖)이 사라짐’이라는 평범한 진술을 시인은 ‘방랑이 죽은 벽(壁/癖)’이라 표현함으로써 벽(壁)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도 함께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감정이 있어야 할 곳에 때수건을’ 건 공간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주제문에 ‘눈보라치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공간을 성공적으로 삽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장 속 어휘배열에 의도적인 탈골을 일으키고, 심하게는 자신의 글들이 비문(非文)에 이르도록 유도했던 시인의 행동 뒤에는 이처럼 여러 이미지들을 중첩시키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뒤틀린 문장이 해석되며 원래의 의미로 회귀할 때, 독자는 통상적인 문법에서는 예상하지 못했을 이미지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서설이 길어졌군요. 예, 맞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오로지 형식론에 기초한 문장 분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문장 분석을 통해 파악한 시인의 문체에 어떤 당위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조연호론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변호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요. 꽤 많은 독자들은 조연호의 시를 언어 기교의 극단을 보여주는 전위적인 작품이라 평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연호가 ‘언어라는 것을 단순한 기표의 미끄러짐으로 생각함으로써 언어유희와 말장난을 정당화하는 시인들과는 오히려 반대의 위치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김춘식 평론가의 입장을 더욱 지지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일 년 전 제게 물었던 인과에 대한 답변을 겸해 부연하자면, 조연호의 시세계에서 형식은 주제를 가장 적절하게 구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그 역(逆)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광선(平光線)과 횡광선(橫光線) 아래

씨앗 망태를 들고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다.

몸을 비틀고 불구를 안고 있는 밤

긴 외랑 기둥 하나를 깨물고서야 나는 이제 헤맬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종자 더미에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야말로

씨앗 이외로는 자신을 불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

밤의 등 근육이 흰 똥으로 이 인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때때로 작은 편지들이 내게 돌을 굴려 보는 날에

노래가 천민의 둥지인 건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 가는 날에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

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꺾인 나뭇가지 같은 이 하늘 밑에서

여(余)는 남의 일기 위에 부디 설명 같은 눈물을 흘려라.

-「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중

이 시는 다른 층위에 놓인 두 개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작품’에 해당하는 공간과, 화자가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는 바깥 공간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두 공간은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는 시구에 이르러 하나의 세계로 통합됩니다. ‘아름다운 작품’에 해당하는 ‘격이 낮은 세계’ 혹은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하는 하늘이 된 순간 화자는 비로소 ‘몸을 비틀고 불구를 안는’ 광견(狂犬)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 가는 날’을 ‘음사(音寫)된 우리’로 인식하며 화자는 ‘종자더미에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야말로 씨앗 이외로는 자신을 불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메타성을 상정하지 않아 발생했던 러셀의 역설(Russell's Antinomy)처럼, 격이 다른 두 세계가 통합돼 형성된 새로운 세계에서는 대상언어(타르스키)로 부재(不在)한 메타언어를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흉내 내기를 위해 시인이 주목한 것은 ‘하나의 영혼을 덮는 둘 이상의 신체’였습니다. 하나의 의미로 여러 이미지를 끌어안은 뒤틀린 문장, 꺾인 수사는 ‘꺾인 나뭇가지 같은 하늘 밑에서 설명 같은 눈물을 흘리는 나(余)’라는 조연호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연호의 시는 주제와 형식의 융합을 성공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적 아름다움마저 담보하는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시는 최근에 이를수록 이전처럼 문장 자체를 비틀어 새로운 이미지를 직조하려 노력하기보단 한자어와 사어(死語)에 기대려는 안이한 경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시의 가독성은 더욱 낮아졌고 그 아름다움은 예전만 못해졌다는 게 제가 받았던 인상입니다. 그렇지만 ‘대를 이어 증오를 탕진하는 눈보라’(「사육사의 완(梡)」)와 그 겨울 속에서도 시인이 잃지 않았던 사랑, 그리고 그 위에 흘렸을 ‘설명 같은 눈물’(「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을 기억하기에, 부디 그가 ‘겨울을 두드’(「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리고 마침내는 채 이르지 못 한 계절에 이르러 예의 그 생경한 아름다움마저 회복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홍미르 기계항공공학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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