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숙 교수
작곡과

“나는 한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시위를 하고 그 시위는 무력으로 마침내 제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용사도 아니었으며, 단지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과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행위를 나의 음악을 통해 하나의 기념으로서 되새기고 싶습니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말이다. 정치적 격변기를 겪고 이제 새로운 시작의 시점에 서있는 최근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 한 번쯤 되새겨보게 되는 말이다.

음악은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물론 예술음악은 오로지 음과 음의 결합을 통해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순수한 미적 영역에 속한다고 하지만, 역사적 흐름을 되짚어 볼 때 음악이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맥락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윤이상은 바로 그 대표적 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는 국내외 언론에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 4월 뉴욕 타임즈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음악적 다리(musical bridge) 역할’을 하는 윤이상을, 서울대 대학신문도 ‘이념을 넘어서 동서양을 잇는’ 그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룬바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음악에 담긴 한국의 사회상을 되짚어보자.

윤이상의 삶은 우리의 현대사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고, 1967년 제3공화국 시절에는 동백림사건을 겪으며 서울로 납치당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73년 미국 아스펜 음악제 참가 중에 접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음악에 담게 되었다. ‘기억’(1974) ‘첼로 협주곡’(1975/76) ‘견우와 직녀’(1977) ‘광주여 영원히!’(1980) ‘화염속의 천사’(1994)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광주여 영원히!’는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윤이상은 독일 출판사(Bote&Bock)에서 발간된 악보의 독일어 서문에 이 사건을 고발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자유로운 인간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에 항의를 했다. 이 시민 항쟁은 10일 간의 처참한 투쟁에서 무참히 짓눌려졌고,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그리고는 그가 경험한 충격과 분노를 강렬한 음악으로 표현했다. 단악장의 교향시 성격을 가지는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며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형성한다. 강한 울림으로 시작해 금관악기군의 진행이 주를 이루는 첫 부분에는 시민의 항쟁과 이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인 제압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고 있고, 느린 템포 부분에서는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불안한 상황이 담겨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의를 향한 염원을 담은 승리의 행렬이 등장한다. 그래서 “마치 주먹으로 벽을 치는 듯한 울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사건을 “스스로 당하고 직접 겪은 것과 같은 충격”이 음향에 담겼다고 독일의 작곡가 슈네벨(Dieter Schnebel)은 평가한다.

이렇게 이 작품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사건을 음악적으로 재현한 표제적 교향시다. 그렇지만 윤이상은 이를 넘어 이 곡이 불의에 항거하는 예술적 표현의 한 전형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독일어 제목은 ‘Exemplum in Memoriam Kwangju’, 다시 말해 ‘광주를 기념하는 본보기 혹은 모범’으로 정한 듯하다. 그는 말한다. “광주는 단순한 고유명사인 도시 이름이 아니라, 이제는 민주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시대에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는 세계 어느 장소와 시간에도 ‘광주’는 살아있고, 앞으로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촛불시위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윤이상의 음악은 잊힐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향한 절규’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을 담고 싶다는 윤이상의 마음이 오늘날 많은 작곡가들과 함께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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