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강사
노어노문학과

촛불집회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대선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행보가 이제야 끝났습니다. 작년 10월 말부터 올해 5월까지, 6개월이 좀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숨가쁜 짧은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는 지리멸렬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대선 결과에 대해 뛸 듯이 기뻐했고 누군가는 아쉬워했습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로 국론이 양분되었을 때, 그리고 선거 결과가 나왔을 때 상황을 분석하면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세대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처럼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특히 첨예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적 작품인 『아버지와 아들』이 발표된 1860년대 초의 러시아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이렇게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 제목만 봤을 때는 가족 내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 부자간의 대립이 작품의 내용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어 제목을 직역하면 ‘아버지들’과 ‘아들들’로, 작품은 가족을 넘어서 아버지 세대(구세대)와 아들 세대(신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 파벨 키르사노프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가 자유주의, 귀족주의, 독일 낭만주의와 관념론(헤겔)의 영향을 받아 원칙, 이상, 절대적 가치, 개인(개성), 문학과 예술을 중시한다면 아들 세대의 대표자, 평민 출신의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 예브게니 바자로프는 철저한 유물론자이자 경험론자로 오감으로 파악될 수 있고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만을 믿고,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문학을 평가하며,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니힐리스트’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바자로프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과제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미래의 창조와 건설을 위해 터전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자로프는 1860년대 러시아의 혁명주의자를 형상화합니다. 그런데 이 지적이고 용감한 청년은 스스로가 생리적이고 화학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규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타격을 입고 낙향하여 티푸스로 사망한 시체를 해부하다가 메스에 손가락을 베여 간단한 소독을 못한 탓에 어이없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열에 들떠 바자로프가 내뱉은 말 - “난 거인이고 할 일이 많은데!” “러시아엔 내가 필요합니다” - 은 독자의 측면에서 매우 모순적으로 이해됩니다. 과연 작품에서 실질적으로 바자로프가 영웅적 행위를 했는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산 작업을 했는가, 독자들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아버지와 아들』 을 읽은 당대 진보적, 급진적 지식인들은 바자로프가 자신들에 대한 희화화라고 격분했습니다. 보수적 진영 역시 작품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며 도대체 투르게네프가 어느 편인지 의아해했습니다. 나이로 보면 구세대에 속하지만 꽤 객관적이고 냉정한 작가인 투르게네프는 그 어느 세대의 편도 들지 않았고, 양쪽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투르게네프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그려내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을까요. 저는 작품의 마지막에 작가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바자로프가 죽고 나서 몇 년이 흘러 그의 늙은 부모가 아들의 무덤에 찾아오는 장면으로 끝나고, 마지막 문장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끝없는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투르게네프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대 간의 갈등이나 반목이 아니라 ‘화해’와 ‘삶’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적폐청산과 함께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통합’과 ‘상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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