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새롭게 시작하는 마로니에의 첫 주제를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지난 호에 마로니에를 실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로니에가 중단된 것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많은데 그럴 능력이 없다’는 뼈아픈 사실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오랜만에 쓰는 거라 감을 잃어서 그런 건지 마로니에를 몇 번 쓰다 보니 써먹을 수 있는 내 밑천이 다 드러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머리를 싸매다가 아직 밑천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내가 쓴 마로니에를 살펴보았다. 그중 작년에 마지막으로 썼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신문』1935호(2016년 11월 14일자)에 게재된 마로니에 ‘이러려고 분노했나 자괴감 들어’는 당시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내가 느낀 분노의 정체가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에서 오는 것이었음을 알아채고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쓴지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현재 분노의 대상이 됐던 이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지 오래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지도 벌써 4개월이 다 돼간다. 그 당시 나를 포함해 하나같이 부패한 권력에 분노했던 사람들도 이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가슴 한편에 간직한 채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정치 혹은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비판적 시각을 지닌 합리적인 감시자가 됐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잊고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거나 없어진 방관자가 됐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맹목적 분노를 역으로 분노의 대상을 무너뜨리고 태어난 새로운 권력에 대한 맹목적 신뢰로 바꿔 현 정권의 무조건적 추종자가 돼버렸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권력을 추종하거나 그에 대한 미련을 가진 채 현 정권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이 중 어떤 모습인가?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그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적 요구들이 쏟아지고 있고 새로운 사회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안들에는 관련 주체들의 입장이 극명히 대립되는 것들이 많다. 이런 상황일수록 앞서 말했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합리적인 감시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매몰돼 비판적 사고 없이 한 쪽 입장을 추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문제라고 방관해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합리적인 감시자는 되지 못한 것 같다. 정권이 바뀐 후 막연히 ‘뭐 새 정부가 잘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안에 대해 추종자와 방관자 사이의 입장을 취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다룰 주제는 많은데 쓸 능력이 없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쓸 능력이 없기 이전에 여러 이슈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글 주제를 고민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위도 가시고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벌써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이제 몇 주 후면 기나긴 추석 연휴가 쏜살같이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정신차려보면 여러 매체에서는 1년 전부터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시 다루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역시 지난 1년간 각자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볼 것이다. 그때에 가서 당시 느꼈던 분노를 곱씹으며 쓴 맛을 느낄지 아닐지는 지금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동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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