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인 편집장

소설 속의 주인공 중에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앤서니 버제스의 『시계태엽 오렌지』에 등장하는 알렉스를 꼽을 것이다.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소설 초반부의 문제아 알렉스가 아닌, 교도소에서 사회 교화 치료를 받은 이후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알렉스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알렉스는 교도소를 벗어나기 위해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다는 사회 교화 치료에 자원하고, 이로 인해 알렉스의 삶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 사회 교화 치료란 눈 한 번을 깜빡할 수 없도록 몸을 완전히 고정시켜놓고 온갖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계속해서 노출시키는 고문을 뜻한다. 이 고문의 끝에 알렉스는 아주 가벼운 폭력에 대해서도 구역질을 느끼며,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위 ‘나쁜 행동’을 범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런 알렉스는 사회 교화 치료의 목적이었던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에 가깝다.

알렉스의 상황은 분명히 극단적이지만, 어쩌면 알렉스가 처한 고통스런 상황을 우리 모두 겪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해야 한다’는 당위만을 내세우며 별다른 합리적 설명이 없이 강요된 교육은 알렉스가 받은 폭력적인 고문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선함’이나 ‘정상’, ‘옳음’ 등의 말로 둔갑하며 학습이 아닌 주입으로 강요된 맹목적인 편견, 바로 이 편견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어딘지 무기력하고 어딘지 나약한 존재가 됐다.

우리가 부당한 편견에 대해 알렉스와 같이 무기력할 때가 많은 이유는 그 교육의 대상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향하기 때문이다. 성별이나 인종, 나이 등 원래 그러했던 정체성에 대해 내리는 당위적인 판단은 약물을 투여하고 잔인한 장면을 시청토록 하면서 그에 대해 반응조차 하지 못하게 했던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회 교화 치료’와 다를 바가 없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며 동성애를 잘못됐다고 말하거나 여자는 어때야 하고 남자는 어때야 함을 설파하는 것이 대표적일 테다. 나름대로 학교를 향해, 또는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는 학생들에 공부나 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비슷한 처사다.

괜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내 정체성에 내려진 폭력적 규정에 대해 안주하는 편의 사람이었다. 학생이니까, 남자니까, 아직 젊으니까,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따위의 말 뒤에 붙는 온갖 말들에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 불편함을 애써 무시했다. 가장 공감이 되는 인물로 알렉스를 꼽겠다는 생각도 사실은 자기 기만적 겉포장에 갇혀 버린 알렉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 나를 둘러싼 기만적 겉포장을 조금은 벗겨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달리는 내 정체성에 대한, 또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 교화 치료’의 허위성을 어느 정도 직시할 수 있게 됐다.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학보사에 들어와서는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여러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 자신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당함을 외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의 결말은 비록 비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그 결말을 우리는 달리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어 본다. 우리를 기계 부품이나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소모품 정도로만 여기는 사회적 폭압에 대해 ‘나’라는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시계태엽 오렌지’로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가 아닌 내가, 또는 우리가 주인공으로 선 소설 속에서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결말이 맺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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