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0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는 소식에 인터넷 여론이 들끓었다. 도 후보자가 의정 활동 기간 유사역사학에 동조하는 성향을 보였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는 2015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 활동하며 동북아역사지도 연구를 무산시키는 표를 던졌고 임명 4일 전인 2017년 5월 26일에는 ‘일본에 의해 왜곡된 고려 국경선은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대륙고려설*을 주장하는 학회에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끌어갈 사람으로서 도 후보자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일부 매체는 “‘환빠(환단고기 추종자)’ 문체부 장관, 도종환 아닌 이덕일이 장관 돼야” 같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역사관 논쟁의 중심에는 ‘유사역사학’이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유사역사학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유사역사학, 한국에 뿌리내리다

2015년 10월,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뉴라이트를 제외한 국사학계, 일선 중등 교사, 학생, 학부모 중 국정교과서의 급작스러운 도입을 반기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국가가 직접 국사 교과서를 펴내려는 시도는 10월 유신 직후 1974년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박정희 정부를 떠올리게 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달랐다. 유신 정권의 국정 국사 교과서는 새로운 체제를 홍보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에서 이를 강하게 반대했으나 효력은 없었다.
그런데 재야역사단체였던 한국고대사학회에서 국정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이 식민사관을 반영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이 이끄는 한국고대사학회는 ‘한국인이 한자를 만들었다’ ‘통일신라의 국경은 북경까지였다’ ‘백제는 4백여 년이나 중국 중남부를 호령한 대국이다’ 등을 주장해 강단 주류학계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강단 주류학계도 막지 못한 박정희 정부의 불도저식 국정화에 제동을 걸었다. 1978년에는 내용정정 청구소송도 제기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신격화하지 않고 제사장으로 묘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사찾기협의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이들은 1980년대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재야사학자’라 자칭하기 시작했다. 강단 주류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로 규정하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맞선다는 의미였다. 자칭 재야사학자들은 고조선의 문화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 수준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로 인정받는 황하 문명보다도 앞섰다고 주장했다. 확신에 찬 그들의 주장은 ‘한국사의 숨겨진 진실’ ‘새로 써야 하는 고대사’ 같은 이름을 달고 대중을 공략했다. 기존 학계의 주장은 사대주의,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라는 것이다. 대중은 이들의 주장에 호기심을 느끼고 열렬히 호응했다. 1999년 10월 2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환단고기』가 이미 100만 권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할 정도였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 동호회와 블로그에서 재야사학에 대한 논박이 활발히 전개됐다. 논객들은 자칭 재야사학자들의 역사관을 ‘유사역사학(pseudo history)’이라 불렀다. 이 용어가 유행하면서 ‘재야사학’ ‘사이비역사학’ 등을 제치고 유사역사학이라는 명칭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언론 등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주류 학계에서는 역사학을 모방했으나 기존 학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비과학적인 사료 해석 및 논증을 유사역사학이라 통칭한다. 기경량 강사(국사학과)는 유사역사학을 사이비과학에 빗대며 “역사학과 비슷하게 흉내내지만 사실은 역사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송호정 교수(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는 유사역사가들이 역사를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며 “역사의 체계와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역사학이라 할 수 없기에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대동강 vs. 난하, 한사군은 어디에?

유사역사학 논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고대사 영역이다. 한국 고대사는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해석이 혼재해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이 고대사 영역 위주로 진행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학자들은 유사역사가들이 고대사 문제에 집중하는 데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쉽다는 점 외에 이념적인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박광용 명예교수(가톨릭대 인문학부)는 유사역사가들을 “강력한 국가, 영광의 국가에 해당하는 사실을 역사로 가르쳐야 한다는 애국·애족을 기본 사명으로 삼는 국수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열강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겪었다는 사실을 초라하게 느끼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찬란했던 과거를 상상한다. 이 과정에서 사실을 변조하고 왜곡하는 것은 물론 없는 사실을 지어내기도 한다. 기경량 강사는 유사역사가들이 “역사가 오래된 것을 ‘위대한 민족’을 나타내는 요건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강단 주류사학계와 유사역사학계는 오랜 기간 한사군의 위치, 임나일본부설*과 단군조선의 실재 여부, 고조선의 강역* 및 국가 형태 등 여러 부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해왔다. 가장 공방이 치열한 것은 한사군의 위치 문제다. 한사군은 한 무제가 세운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진번군 총 4개의 군을 가리킨다. 이들 4개 군의 위치를 두고 난하 유역설(지도①)과 대동강 유역설(지도②)이 대립하고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염난수’라는 지명을 전자는 난하(灤河)로, 후자는 압록강으로 해석한다. 이 논란은 한사군, 그중에서도 400년 이상 존속한 낙랑군의 위치가 한국 역사의 출발점을 해석하는 단서가 되므로 중요하다.

(지도①)
(지도②)

논란의 중심은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하는지에 따라 한국 고대사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과 한사군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대동강 유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위만조선을 고조선 역사에 포함한다. 송호정 교수는 “위만은 중국 연 출신이지만 고조선 준왕을 밀어내고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이며 위만조선은 후기 고조선의 중요한 역사로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은 모두 위만조선의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난하 유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통설을 주로 비판한다. 위만조선은 북경 근방의 소국에 불과한데 주류 학자들이 이를 평양으로 옮기고 고조선을 계승한 것처럼 날조했다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대동강 유역설을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일제가 낙랑군 유적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한대의 낙랑군을 만주에 비정*하면 고대의 식민 경험을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유사역사가들은 1930년대 평양에서 출토된 200여 점의 봉니가 조작된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공석구 교수(한밭대 인문교양학부)는 일부 봉니가 고고학적으로 진실성이 의심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평양 및 그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봉니(사진①)를 모두가 조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응수했다. 공 교수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라 쓰인 와당(사진②), 전한 시기의 호구조사 자료, 기원전 45년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수 증감을 기록한 나무판 등을 313년 이전 평양에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했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는 2,600여 기의 낙랑고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관련 기록을 검토해보면 낙랑군이 평양에서 중국 요서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삼국사기』에 낙랑군과 관련한 마지막 기록이 나타난 것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 때지만 중국 『자치통감』 등에는 그 이후부터 평양에서 요서로의 이동과 중국 요서 지역 내 낙랑군의 존재를 다룬 기록이 다수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진①)
봉니는 고대에 죽간이나 목간으로 된 공문서를 묶은 노끈에 점토덩어리를 붙이고 인장을 눌러 찍은 것이다. 공문서를 봉인하는 데에 쓰였다. 평양 일대에서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등이 새겨진 봉니가 대규모로 발견됐다. 하지만 유사역사가는 물론 일부 주류 강단학자들까지도 일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주류 학자들은 일부 봉니가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고고학적 증거가 많으므로 대동강 유역설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유사역사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진②)
와당은 수키와의 끝을 원형으로 막는 건축자재다. 공석구 교수(한밭대 인문교양학부)는 “와당은 공적인 관청 같은 곳에서 사용되던 건축부재”라며 평양 일대에서 발견된 와당을 낙랑군 평양설의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이 와당들에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 와당은 절당법(와당과 수키와를 접합한 부위의 절반을 실이나 대나무 칼로 절단해 만드는 기법)으로 제작됐다”며 낙랑군이 있던 시대의 와당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학계의 문을 두드렸지만

유사역사학이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문적 성격의 부족이다. 박광용 명예교수는 “위서를 정사라고 주장하거나 사료 왜곡을 일삼는 행위는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근원에 대한 유사종교적 신념과 결합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위서임이 판별된 『환단고기』나 『단기고사』를 유사역사학의 사료로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부 유사역사가들은 이 책들이 위서임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가령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2007년 9월 저자간담회에서 “내용이 맞다 틀리다의 차원을 넘어 『환단고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위서는 말 그대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므로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사료로 쓰일 수 없다. 송호정 교수는 “믿을 만한 사료가 아닌 두찬*이나 위서로 허황된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역사학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주류 역사학계가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학술적인 토론을 거쳐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 기경량 강사는 유사역사가의 주장을 쇼비니즘*으로 봤다. 유사역사가들이 주류 학자들의 반증을 차단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유사역사가들은 평양 일대에서 낙랑군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됐음에도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북경 근처에만 있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학문의 공론장에서는 건전하고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차 검증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유사역사가들의 논리를 비판한 학자들의 실명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학술적인 근거에 따른 논박보다는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이 먼저 눈에 띄는 실정이다.
유사역사가들은 민족주의 사학을 표방한다. 하지만 송 교수는 『역사와 현실』에 기고한 특집 논문에서 “유사역사학자의 경우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반민중적 역사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며 “우리 역사만이 웅대하다고 주장하고 주변 역사와의 비교를 거부하거나 세계사 속에서 위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역사학은 존재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사역사가들은 고대사에서 한민족이 누구보다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위용을 떨쳤을 것이라는 국수주의적인 믿음을 드러낸다.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주지 못하는 증거는 조작된 것으로 치부한다. ‘무령왕릉 조작설’이 대표적이다. 1971년 유사역사가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을 보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 연구에 큰 도움이 됐지만, 이들에게는 위조품이 미리 묻혀 있던 조작된 왕릉일 뿐이었다. 박 교수는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일본 문화나 중국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화려한 유물보다는 독자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유물의 출현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사역사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북아역사지도는 독도를 누락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검은 상자 안에는 울릉도만 표시돼 있고 독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작고 흐릿한 하얀 점으로 표시된 탓에 해상도가 낮은 스캔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상자 우측에는 독도가 표시돼 있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나타내면서 생긴 해프닝이다. 하지만 이덕일 소장은 자신의 저서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 “검은 상자를 만들어 울릉도를 표기해놓고는 독도를 누락시켰다”며 “이는 독도가 우리의 강역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은 동북아역사지도가 독도를 누락했다고 보도했고 사업은 철회됐다. (사진: 연합뉴스TV 유튜브 캡처)


정치와 종교라는 양 날개를 달다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캐럴은 『회의주의자 사전』에서 현재의 특정한 정치적, 종교적 의제를 지지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것을 유사역사학의 유형 중 하나로 꼽았다. 유사역사가들은 주류 학계가 한민족의 영역을 축소하고 역사를 부정하려 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강단 주류학자들에게 권위주의, 매국과 식민사학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는 거대 적폐에 대한 도전, 애국과 민족주의로 포장하면서 이분법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대중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신뢰하기보다는 영웅을 자처하는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유사역사가들은 정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들의 신념이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도록 했다.
유사역사가들은 주류 학계의 주장이 반영된 국사 교과서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왜곡하고 민족 정체성 확립이나 청소년의 자아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박광용 명예교수는 오히려 유사역사학계의 입김으로 교육과정 고시에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이 지속해서 반영됐다고 반박한다. 단군조선을 신화가 아닌 역사라고 못 박고 아직 부족국가 단계여야 할 시대를 열국(列國)시대인 것처럼 묘사하는 식이다.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도 발해가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주장을 기정사실처럼 싣고 있다.
유사역사학의 공적 영역 개입도 점점 심해지는 추세다. 2006년 9월 정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정부 및 학계 차원에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법인으로 동북아 역사 전반에 대한 연구, 저술, 출판 및 보급 활동을 진행해왔다. 2007년부터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와 진행한 ‘고대 한국 프로젝트’도 재단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2013년 마크 바잉턴 교수(미국 하버드대)가 프로젝트의 하나로 출간한 책이 문제가 됐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근처로 표시했다는 이유로 유사역사가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바잉턴 교수는 동북공정을 일삼는 식민사학자로 매도됐고 연구비 지원은 중단됐다.
2015년 4월 17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서는 동북아역사지도가 문제가 됐다. 이덕일 소장이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를 식민사관의 산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일부 지도에서 독도를 누락하고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에 표시하는 등의 왜곡을 일삼았다는 주장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이 소장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이날 공개된 지도는 완성본이 아니었고 디지털 지도에는 독도가 나와 있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지도에 독도가 빠져 있다는 식으로 잘못된 사실이 퍼지면서 동북아역사재단은 비난 포화를 맞았다. 결국, 2016년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은 완전히 철회됐고 8년간 46억 8천만 원이라는 시간과 예산이 물거품이 됐다.
역사학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송호정 교수는 이를 “학계에 대한 집단테러”라고 표현했다. 당시 국회는 전문 분야인 역사학을 다루면서 학자들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유사역사가의 말만 믿고 순수한 연구성과를 무산시켰다. 박광용 명예교수도 당시 상황을 분서갱유에 빗대며 “재야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인들의 힘을 빌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 대해 독도를 빠뜨렸다며 비난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왔다. 심지어는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매국노를 기억하라’는 말을 남긴 트위터 사용자도 있었다.
한편 유사역사학은 민족주의 사관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좌우를 막론하고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증산도는 종교적 차원에서 『환단고기』를 경전처럼 여기고 보급하려 노력하고 있다. 증산도는 『환단고기』를 대중에 적극적으로 노출하고 알리기 위해 서울 모 대형서점에 코너를 마련하고 대학 및 공공도서관에 『환단고기』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식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또 『환단고기』 번역서를 꾸준히 출판하고 STB 상생방송을 통해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다수 제작해 송출하고 있다. 자본력을 활용해 ‘세계환단학회’라는 이름으로 국내외에서 학회를 꾸준히 열고 연구자들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대중은 유사역사학의 주장이 얼마나 정교한 논리체계에 근거했는지보다는 얼마나 흥미로운지에 집중했다. ‘고조선보다 이전 시기에 있던 한(韓)이라는 국가가 사실은 우리 민족의 뿌리’라는 유사역사학적 설정에서 출발한 김진명의 소설 『천 년의 금서』가 50만 부 이상 팔린 것이 그 예다.
주류 학계에서도 시민을 상대로 대중 강연을 다니고 대중서를 펴내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1970년대 이후 유사역사학이 대중에게 지속해서 영향을 미치기까지 사학계의 대응에는 소극적인 부분이 있었다. 1980년대 이후로 대중 역사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책을 썼다. 하지만 문턱을 낮추는 과정에서 유사역사가들 또한 언론,출판물 등으로 대중에 다가설 기회를 얻었다. 언론 인터뷰, 대중 강연, 저술, 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유사역사학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경량 강사는 “적극적으로 자주 발언해 잘못된 점과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 또한 여러 학회와 연구소, 대중적 역사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역사학의 대중화를 위해 사학계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송 교수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유사역사가들이 노이즈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고사할 수 있도록 무관심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영국 옥스퍼드대)은 『역사사용설명서』에서 “우리가 이미 하기로 결심한 것들을 정당화하려고 과거의 근거를 입맛대로 취하다 보면 우리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은 학문의 한 갈래다. 그렇기에 당연히 과학적 타당성과 객관성이 필요하다. 사료는 한계가 명확하고, 나올 수 있는 해석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어떤 해석이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석구 교수는 “역사학자는 자료를 철저하게 분석,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얻은 합리적 진실을 자기 나름의 해석을 통해 타인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연구자”라고 말했다. 유사역사가들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등에 업고 지속해서 매체에 노출되며 파급력을 키워가고 있다. 학계 내에서는 유사역사학과 오랜 논쟁으로 연구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송호정 교수는 “문헌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권력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강조할 경우 엄격한 사료 해석을 본령으로 하는 역사 연구의 퇴행을 불러올 수 있다”며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고 “한국 고대사 전체의 체계를 세우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제언했다. 역사는 실증적이다. 믿고 싶은 역사는 역사가 될 수 없다.

›› 기사 용어 설명

*대륙고려설: 고려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해 중국대륙까지 있었다는 주장
*동북공정: 정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으로 중국 동북 3성(헤이룽장 성, 지린 성, 랴오닝 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주변 소국의 시조를 중국으로 해석해 소수민족의 분쟁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중국 정부가 주도
*임나일본부설: 4~6세기에 일본이 가야에 통치 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일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학설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폐기
*강역: 국경과 영토를 복합적으로 이르는 말
*비정: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의 위치를 비교해 추정하는 일
*두찬: 출처가 확실하지 못하고 틀린 부분이 많은 책이나 저술
*쇼비니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광신적인 애국주의, 국수주의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레이아웃: 조수지 기자 s4kribb@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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