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것들에 대하여

임혜린 국어국문학과·16

당신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간호병 주제에 외진을 간다
외진을 가는데 구급상자 하나 아니 들고 간다
당신을 보러 가는 길가에 살아남아
세상의 꼭짓점처럼 찍혀 있는
가지가 부러진 플라타너스들
껍질 벗어지는 그들을 따라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긋는다

내 등 뒤로 버려진 참호의 간호병들
아픈 간호병들 다친 간호병들
아픈 주제에 다친 주제에 간호병들
간호병인 주제에 아프고 다친
몸이 불편한데 간호병인 사람과
몸이 불편해서 간호병인 사람
나는 플라타너스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간다
나무마다 그림자가 죽음처럼 달라붙어 있다
간호병인데도 간호병이어서 보는 것들
길가에 누운 잎과 가지마다 그 이름을 붙이며 간다
당신의 상처를 소독하려 할 때
내겐 위생장갑이 없고 면봉이 없고 탈지면이 없고
손바닥에 빠듯이 차는 약병 하나에 많은 것을 걸어야 한다

내 맨손의 세균을 씻어내는 몇 방울조차 넉넉하고 아까워
당신의 상처를 천천히 슬퍼할 때
나와 당신의 맨살은 색이 다르고 언제부터였는지
그 이름도 달라졌다

우리가 보았던, 지는 해를 힘겹게 들이키는 플라타너스들
죽은 간호병들을 끌어안고 가라앉는 부러진 가지들
가장 화창했던 전투 다음날의 아침 인사와 작별들
그들을 꼼꼼히 펴 보며 당신의 상처에 바른다
이전의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그것을 서러워할 수도 없다
가장 서러운 것들은 이미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짧게 포옹하고
내 그림자 같은 후회를 밟으며
돌아간다
돌아가는데
아무것도 아니 들고
간다



물의 노래

윤지혜 사회학과·15

유리대야, 흔들리는 투명한 물
그것은 기다림
그것은 진실, 정

팔꿈치, 웃다가 툭 치고
불룩 비져나온 뱃살
네 아버지, 입술에 튀김 냄새, 옷자락에 찌든 발자국같은 체취를 풍기며 벽으로 몰아붙일테지
오줌싸개처럼 적신 신발
도망치는 깨진 조각의 선율

가냘프고 높은 노래는 비틀거리며 바다 앞에 선다
두 발로 섰다
눕는다
바람과 파도 말소리가 흘러간다

그의 안색에 물이 먹었다
손을 뻗어본다
차갑고 깊어
어깨까지 넣었다가 이마도 담근다 들어간다
뒤, 순대볶음 씹는 냄새



바다를 둘러싸고

강민주 아시아언어문명학부·13

1. 땅

기분은 우리의 전부인 것 같았지만
때로 서로의 기분을 위해 진정으로 원하는 말들을 삼킬 때, 번복할 때
우리는 유예된 불안과 불만이 가슴 속에서 계단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무서움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미소 지으려 노력했다
그 미소야말로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메마른 땅에서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우리는 함께 곤두박질 치거나 함께 비상할 운명이었다.
발작하는 웃음,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동굴 속을 배회하던 채로 내뱉어진 목소리, 깨어있지만 잠이 든 것보다 나쁘게,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습관과 관성들의 춤판에서 우린 서로를 사랑했기에 무수히 산산조각 났다

입맞춤의 횟수와 성교의 빈도가 헤아려지고
어김없이 애무하는 손길 속에서 익숙함에 속아 감긴 두 눈은 너무 일찍 절정의 꿈을 꾸는데
흥분하기 위해 노력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닳아가는 몸뚱아리의 막막한 침묵을 끈질기게 게워내고

곧 더 이상 부서질 것도, 닳을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돌아온다.
그 진부한 막장의 계절.
솟아오르는 미움과 가눌길 없는 불안을 얼리려 에어컨을 켰다가 그만 네 벗은 맨살이 가여워 이불을 덮어주면
시간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2. 바다

갓난아기적 발 담갔던 물이 해마다 파도로 치는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혼자 잠을 청하려 돌아눕는 내 그림자도
홀로 불안을 삭이려 디지털 화면을 보는 네 모습들도 떠밀려와
다리 뻗고 앉아서 파도 기다리는 우리 어릴적 웃음소리 옆에 스며있다

수평선을 보는 서로의 눈동자에 과거의 연인들이 비쳤다가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신이 난 두 사람은 꼭 안은 채 죽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바다 속으로 걸어간다

고개를 돌리자 손짓하는 구조대원과 먼 해변
온 세상이 같이 놀자며 까르르 손짓하는 것도 마다하고 허겁지겁 나오는데
꽉 잡은 두 팔뚝은 무슨 기쁨이라고 이리 펄펄 끓는가

난생처음 칠 수 있게 된 바다헤엄으로 잠수한 물 속에서
흐르는 세월에 혼자가 되고 싶은 둘의 서러움이 먼 고생대의 소금기에 휘감기고
문득 붙잡은 너의 손 너머로 끝없이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바래가는 육욕의 밤들을 진흙으로 발라대며 깔깔거리고
집채만한 파도 속 깊은 엇갈림의 상흔이 등허리를 때릴 때 세상 모르고 웃다보면
어느새 살을 태우는 뙤양볕처럼 해변을 가득 메운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들
에도 개의치 않고 가뿐하게 바다로 달려가 바다를 껴안듯이, 바다 품에 안기듯이,
너를 껴안고 네 품에 안기기 위하여
나는 지치지도 않고 너를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다

3. 섬

섬에 갇힌 우리가 함께 보았던
여름 밤 아지랑이로 흘러내리던 불길한 예감들이
네가 떠나고
그 빈자리로 밀려들어와
차분한 저물 녘, 눈동자는 쫓기듯 흔들리고
혀는 맛을 잃은 채 굳어간다

남들의 입에서 우리의 운명은 여러 번 작살나는데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시를 쓰고 돈을 번다
우리의 섬은 가라앉았고
또 다시 지겨운 자유의 몸이 되어, 떨며
세상에 홀려 쏘다니려는
두 사람의 헤엄이 이인삼각일 때
뻔한 죽음은 지척이건마는

차라리 웃으며
더, 더 깊이 자맥질하려느냐, 아이들아
섬을 끌고 솟아오르는 날에
너희 숨이 아직 굳지 않았거든
둘 머리 위로 부는 바람에
하늘도 말갛게 펄럭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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