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투쟁의 불꽃', 학생운동

▲1984년 3월 14일, 아크로폴리스에서는 2천여 명이 참여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총회가 열렸다. 작은 사지은 지난 9월 14일 열린 개강 집회. 관악 2만 학우 중 40여 명만이 참여해 진행됐다. © 대학신문 사진부

 

6․3 학생운동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군사독재 퇴진'의 구호를 내걸고 1964년부터 2년여에 걸쳐 1만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투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위수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지만, 서울대 등 각 대학은 한일회담 체결 이후에도 비준 반대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75 년 4월 11일에는 김상진 열사(축산과․68)가 수원 캠퍼스에서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할복 자결했다. 1975년은 유신 통제가 더욱 강화되고, '인혁당 재건위원회'사건으로 도예종씨 등 8명에게 선고된 사형이 하루만에 집행된 '사법살인'이 일어난 해이다.

 

 

1980 년 12월 11일, 학생회관과 도서관 계단에는 '반 파쇼 투쟁'의 구호가 적힌 유인물이 뿌려졌다. 서울대생이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와 5․18 광주사태에 항의한 이 시위는 '언더'라는 지하써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안개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숲(서울대 지하써클)을 보았다고 해서 '서울대 무림(霧林)사건'으로 불린다. 이후 '학림(學林)'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으며 서울대 학생운동은 더 조직적, 전투적으로 변해갔다. 

 

 

'백골단'과 사복경찰이 학내에 상주하던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관, 도서관 등을 학내 거점으로 삼고 화염병을 던지거나 투석전을 벌였다. 1987년 총학생회 기획실장 김광수씨(전기공학과․84)는 "소주․맥주를 마시면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빈 병을 모았고, 시위 현장의 보도블럭을 깨서 던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본부는 보도블럭이 투석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87년 교내 도로를 콘크리트로 포장했다.

 

 

1980 년에서 1987년까지 48명의 학생이 자결할 정도로 투쟁은 극렬했다. 1981년 김태훈 열사(경제학부․78)는 광주사태에 분노하며 중앙도서관 6층에서 투신했고, 1986년에는 이동주 열사(원예학과․83)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제국주의․폭력경찰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1984 년 '학원자율화조치'에 따라 학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학생회관, 2동 등에는 '자유의 벽'이 설치돼 NL과 PD간의 유명한 이념논쟁이 대자보를 통해 진행됐다.

 

 

1991 년 '강경대군 사망사건' 이후 정권 퇴진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대생들은 5월 9일부터 전면적인 동맹휴업을 결의하고,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결의대회 출정식'을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진 뒤 가두투쟁을 벌였다.

 

 

1987 년 이후 서울대생들은 정권 퇴진 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촉구,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범민족대회에 5대의 헬기가 최루액 5L을 살포했고, 7천3백여 명의 병력이 난입해 시민과 학생 1천5백여 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점거 사건 이후 학생운동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1992년 부총학생회장 송욱씨(섬유고분자학과․89)는 "운동 방식에 대해 학생들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2003 년 제47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해 학생회 선거가 무산됐다. 2004년 5월 7일 전체학생대표자회의 공청회에는 대의원이 10여 명밖에 모이지 않아 회의가 연기됐고, 2학기 학생회비 납부율은 37.7%로 최근 5년 동안 가장 낮았다.

 

 

총학생회장 홍상욱씨(경제학부․99)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과거의 학생운동 방식은 요즘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며 "다양한 생각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학생운동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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