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푸른 그리움이군." 해마다 보는 가을하늘인데, 터지는 건 감탄이다. 이런 날에 책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나? "그래, 오늘이야!"하고 조금 일찍 연구소를 나왔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그곳에서는 '신화 없는 탄생, 한국 디자인 1910~1960'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제목부터 거창하다. 다루는 시대 범위는 무려 반세기를 넘는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이 전시는 역사, 예술, 공예, 산업, 전쟁, 정치, 소비, 일상, 문화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총 망라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학제간 연구의 욕망을 자극했다. 큰 주제에 대한 막중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기획을 맡은 큐레이터는 이 전시를 '빈틈을 허용한 무덤덤한 시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실은 역사의 빈틈을 다 채울 수 없는 현실을 둘러서 말한 것이리라. 어쨌든 어설픈 신화창조보다는 '신화 없는 탄생'이 백번 낫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집: 도시 거주민의 꿈'이라는 공간이 펼쳐졌다. 식민지시대 경성의 도시형 한옥에서 문화주택의 출현, 그리고 한국전쟁 후 재건주택과 1958년 처음 들어선 아파트까지, 일상공간을 재조직하는 근대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모퉁이를 돌자 '소비: 행복의 이미지들'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주거공간의 실핏줄 같은 골목길을 따라 거리로 흘러드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인간의 바다, 광장.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관공서, 상점들과 대형 백화점들이 보였다. 그리고 거점들을 연결해주는 도로망과 교통망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치사, 사회사, 개인사에까지 연결되는 디자인의 역사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 새삼 확인한 계기 

옛 경성을 보여주는 슬라이드를 뒤로 하고 다시 옆으로 가보니, '거대기계: 국가, 전쟁, 공장'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병참기지로 재구조화되던 식민지 조선. 전시회는 '국가는 전쟁의 주체로서, 그리고 거대한 치적의 주체로서 자신을 전면에 드러냈다'는 것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었다. 한 사료는 미시사의 미덕을 입증한다. '어제부터 새로운 일상생활 프로그램이 반포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 7시나 7시20분에는 활거요배를 해야 하고, 정오에는 용맹했던 전몰장병들에게 묵도해야 한다(1940.9.2 「윤치호 일기」 중).' 심지어 '카라멜도 싸우고 있다'는 밀크카라멜 광고를 보니 내가 태평양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시의 나머지 공간은 '커뮤니케이션: 시각언어'와 '산업미술가: 임명된 직업'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었다. 옛날 상품들과 디자인, 실제 제품과 광고 등 볼거리가 많았다. 성냥, 음료수 등 가물가물한 추억을 되살리며 천천히 돌아보다가, 숨이 턱 막혔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재봉틀이 거기 놓여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다 "어머니"하고 나직이 불렀다. 디자인의 역사가 정치사와 사회사를 관통해서 나의 개인사로까지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기억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개인사와 집단사 사이의 '연결됨의 정치학'을 추구하는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체험이 되었다.

 

오늘날 학문분과들은 서로 대화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노을이 지는 전시관을 뒤로 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했다. 이 부분에 관심 있는 학부생, 대학원생이 모인 한 동아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운쎈 천막'(kimminsoo.cyworld.com) 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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