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타인의 얼굴은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여기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이 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가정적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얼굴을 통해 악은 악마적 본성이 아니라 무비판적인 순응에서 기인한다는 ‘악의 평범성’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명령의 수행자기만 했을까? 영화 <아이히만 쇼>(2015)는 아이히만의 얼굴을 평범하게만 포착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이 TV쇼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세기의 재판이었고, 세기의 생방송이었다. 블랙리스트 감독 허위츠는 아이히만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집요할 정도로 그의 진짜 얼굴을 잡아내는 데 몰두한다. 그것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자, 만들어진 파시스트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나치의 잔인함을 증언할 때 그의 얼굴 어디에도 죄를 깨닫는 놀람이나 부끄러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인간적인 모습은 없다. 이에 허위츠는 좌절감을 느낀다. 아이히만은 담담하게, 때로는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기소절차 상 자신은 무죄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영화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 그의 얼굴에 관객이 집중하도록 만든다.

아이히만의 얼굴에 주목한 이는 또 있었다. 소설가 최인훈 또한 법정 유리 상자 속에서 리시버를 쓰고 있는, 온 세계의 보도 매체에 넘쳐났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보았다. 1973년에 연재된 최인훈의 <태풍>은 식민지 출신 하급 장교 오토메나크가 제국주의 이념이 허상이라는 진실을 깨닫는 도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만하임 사건’이란 바로 아이히만 재판이다. <태풍>은 주인공의 얼굴에 아이히만의 얼굴을 겹쳐놓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주인공은 제국의 군인으로서 가해자일 뿐 아니라 식민지인으로서 제국주의의 피해자기도 했으며 하급 장교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얼굴에 대표적인 전범 아이히만의 얼굴을 겹쳐 놓는 것은 책임윤리 문제에 대한 미묘한 부분을 건드린다. “만하임의 손이, 그 일에 대한 단 하나의 피 묻은 손은 아니다” “그러나 만하임의 손이 그 일에 가장 가까운 손의 하나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사람의 법은 그 손을 처벌한다”는 구절에는 전쟁 범죄를 한 개인의 책임만으로 귀결시키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내포돼 있다. 이처럼 아이히만의 얼굴은 우리에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의식들을 던져준다.

한편, ‘얼굴의 윤리학’을 주창한 철학자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비참한 얼굴, 고통받는 얼굴은 그 자체로 책임감을 일깨우는 ‘무상명령’이다. 영화 <아이히만 쇼>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이들의 실제 사진을 교차 편집해 분노와 책임감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학생의 얼굴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가해자들의 얼굴 또한 온라인상에 퍼졌다. 가해자들의 얼굴을 기억하며 이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고통이, 타인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에는 일종의 함정도 있다. 타인의 얼굴과 고통이 마치 쇼처럼 전시되고, 구경거리로만 소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들에서 무엇을 보는가.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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