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족이 왜 이리 어려울까?
우리는 가족이 왜 이리 어려울까?
  • 대학신문
  • 승인 2017.09.1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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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교수
인류학과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 ‘가족과 친족의 인류학’에 여섯 명의 학생이 신청했다. 한 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유학생이고, 다른 다섯 명은 한국 학생들이다. 한 명은 남학생이고, 다섯은 여학생이다. 한 명은 혼인을 했으며, 다른 한 명은 아이가 있고, 나머지 넷은 혼인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데, ‘애인’인지, ‘파트너’인지, ‘여자·남자친구’인지 ‘썸남·녀’인지 등, 어떤 관계를 맺는 대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모두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수업 두 번째 시간, 원래 강의계획표대로라면 우리는 가족과 친족의 기본 개념을 학습하고, 가족 및 친족에 대한 연구사를 간단하게나마 훑어보며, 출계(출생과 계통관계)의 다양성에 대해서 논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세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조지 머독의 ‘가족’에 대한 정의 주변에서 맴돌다가 마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란 공동의 거주, 경제적 협력, 그리고 생식이란 특성을 가진 사회집단이다. 가족은 성관계를 허용받은 최소한의 성인 남녀와 그들에게서 출생하였거나 양자로 된 자녀로 이루어진다.



공동의 거주? 오늘날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가. 유학생, 기러기 가족, 주말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이나 중국에서 이주한 입주 가사도우미들은 자신의 아이를 본국에 놔둔 채 다른 한국인의 아이를 돌보며 산다.

경제적 협력? 논의가 분분했다. “그래도 경제적 협력이 오늘날 가족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는가?”라는 주장부터 “협력이 아니라 노동착취다”라는 입장까지. ‘생식’이라는 단어를 보더니 모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가 ‘저출산’ 문제를 지겹도록 떠들기 때문일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기능을 지녔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생식’이라는 단어는 이미 공포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포함해서 그냥 친밀감을 느끼고 애정이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가족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자신의 애정과 친밀감만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돌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해요.” “대부분 내가 선택한 사람들도 아니고, 가족이 애정, 화목, 친밀감이라는 단어와 꼭 결부된다는 것도 이상해요. 사실 가장 끔찍한 폭력들은 가족 간에 일어나잖아요.” “저는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같이 밥 먹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가족 같아요.”

우리는 가족이 왜 이리 어려울까? 가족에 대해 다들 부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에서 늘 말해오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형태를 원했고, 가족 성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부모 세대와 거대한 관점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으며, 애정이나 친밀감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더 이상 기존 가족이 일차적인 지지집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반면, 공동체 가족이나 비혼여성의 모임, 아이가 없이 언제든지 감정이 식으면 떠날 수 있는 쿨한 부부관계와 같은 다른 상상들이 존재했다. 물론 그러한 대안들이 반드시 밝은 미래만을 약속할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오래 전 친구의 소개로 사두고는 이런 저런 핑계로 미뤘다가 방학 끝자락에 『19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이 책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가족이라는 건 뭘까? 세대 간의 경험,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삶은 과연 얼마나 다르고, 또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가족이 문제가 많은데도, 동성애자들이 가족을 이루고 싶어 하는 까닭은 왜일까? 이런 내용이 ‘소설’로 나와야만 이해되다니. 그럼 그동안은 이처럼 훌륭한 소설가가 없어서, 여성의 삶과 노동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19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여자 김지영과 또 다른 세대를 대변하는 김지영 어머니의 삶이 공감되고 공론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여하튼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불안하다.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하듯, 이처럼 소설을 통해 ‘진하게 한 번 공감하고는’ 우리는 함께 사는 이들에 대한 이해와 돌봄의 책임을 다했다고 혹시라도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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