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를 표방하던 대통령 후보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와 내 친구들의 존재를 반대한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분노한 성소수자 단체 소속 활동가들은 무지개 깃발을 온몸에 휘감은 채 문재인 후보의 기자회견 도중 기습시위를 전개했다. 활동가들의 시위가 무력으로 저지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문재인 후보에게 목청껏 사과를 요구했다. 문재인 후보는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고, 이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합의가 모이지 않아 시기상조라는 공허한 말만을 되풀이했다. 활동가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간편하게도 그 거리를 넓힐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에는 꾸겨진 무지개 깃발만이 쥐어져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많은 이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도대체 성소수자, 여성, 이주노동자 등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민주주의가 확립된 대한민국에서 어떤 차별을 마주하며 있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오해한다. 인권은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이 합의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소수자들이 ‘권리’를 요구할 때 그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소수자들에게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특정 권리를 주는 것은 다수를 향한 역차별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인권이란,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자가 선택한 윤리적 입장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인권이 권고나 가이드와 같이 피상적인 형태가 아닌, 권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예컨대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보자. 2000년대 이전까지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편 혹은 다수로 일컬어지는 사회구성원들은 모두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행위를 특별한 권리로 취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교통약자가 도보와 문턱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대중교통을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권리를 명명하는 작업은 이 때문에 요청된다. 시민사회의 요구 끝에 2017년 현재, 이동권은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 하나의 권리로서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다. 민주주의는 폭력적인 권력자로부터 다수의 인권을 수호하는 데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만으로는 소수자의 인권을 체계적으로 명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우리는 범람하는 차별과 혐오를 피해 도망가고 싶지만, 차별과 혐오는 결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호오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권력의 문제이기에 이로부터 도망치기가 여간 쉽지 않다. UN의 사회권위원회는 지난 10일, 한국을 상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재차 권고했다. 차별금지법 또한 이성애중심적인 사고가 보편인 사회에서 성적 지향성을 기반으로 성소수자 개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권리에 대해 역설한다. 물론 선언적인 의미의 헌법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상 우리 사회가 평등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규범은 이미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규범이 권리의 영역에서 실천되지 못하고 있음 또한 자명하다.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려 차별의 문제를 ‘합의’의 영역에서 논하는 것을 그만두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편견과 혐오를 성찰해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기본 대원칙에 대한 굳건한 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