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지 HK연구교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을 읽지 않았더라도 ‘베르테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실연의 아픔 그리고 청춘의 고통을 한몸에 함축한 대명사이자 문학적 상투어인 그 이름. 요즘은 현지 발음에 가깝게 ‘베르터’로 표기하고 또 독일어 원제목의 ‘Die Leiden’의 의미를 살려 ‘슬픔’ 대신 ‘고뇌’로 번역하는데, 오래 굳어져 온 탓인지 ‘베르테르’와 ‘슬픔’의 조합이 더 친숙한 것만은 어쩔 수 없다. 1923년 백화 양건식이 처음 이 작품 일부를 번역했을 때의 제목은 『소년 벨테르의 悲惱(비뇌)』였다. 슬픔과 고뇌 어느 한쪽도 포기하기 싫었던 번역자의 고충과 욕망이 ‘비뇌’라는 낯선 한자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슬픔이든 고뇌든 간에, 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청년 베르테르가 품었을 오만가지 감정과 생각들을 논할 수는 없는 법. 소위 ‘명작’들을 읽는 교양 강의 시간에 이 작품을 선택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다수의 학생들이 “완독하는 것이 힘겨웠다” “베르테르의 감정과 선택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는 반응을 보였다. 책의 대부분이 베르테르의 독백과도 같은 편지로만 채워져 있으니 지루했을 법도 하다. 이 책이 쓰인 1774년 스물다섯 살의 괴테 또는 베르테르와 비슷한 또래의 20대라고는 해도 자연과 우주에 대한 성찰, 연정의 대상이자 소울 메이트인 로테에 대한 들끓는 애정,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갈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쉼 없이 펼쳐지니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편지쓰기였다. 그 모든 편지들의 수신자인 벗 빌헬름으로 빙의해, 절친 베르테르에게.

작품 안에 빌헬름의 목소리가 담긴 답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베르테르가 그 모든 환희와 고통, 격정과 성찰의 순간들을 토로하는 유일한 벗으로서 그 이름이 호명될 뿐이다. 빌헬름을 어떤 벗으로 성격화할 것인지, 그가 이해하는 베르테르는 어떠한 인물인지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열려 있었다. 한 시간의 고뇌 끝에 쓰인 장문의 편지들이 낭독됐다. 누군가는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니 포기하지 말게’라고 힘주어 말했고, ‘자네를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겠네’라는 모범생다운 답안도 나왔다. 베르테르의 죽음 앞에 비통한 문장으로 ‘내가 자네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한 글도 있었고, ‘사랑이란 건 한 순간의 감정일 뿐 절대화해선 안 되는 것을!’이라며 애석해 하기도 했다. ‘내가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를 해치울 테니 사랑의 도피를 하라’며 미스터리 치정극을 꾸민 글도 있었다. 20대 초반 어느 시점에서의 성격과 개성이 가지각색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가 베르테르와 빌헬름에게, 또 자신과 타인에게 가 닿았으리라.

평생 소설을 쓰면서 세계와 타인, 언어와 소통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졌던 이청준은 문학을 하는 이유를 ‘자기구원’이라고 했다. 김수영은 “시(詩)는 문화와 민족,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도 문화와 민족과 인류 그리고 평화에 공헌한다”고 믿었다. 시절이 하 수상하고 삶이 무던히도 고달픈 오늘, 지금이 문학을 곁에 둬야 할 바로 그 때라고 모든 작가들은 줄곧 말한다. 잠시 동안 빌헬름이 돼 보았던 그들이 십년 뒤 또는 이십년 뒤에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고 베르테르에게 보내는 또 한편의 편지를 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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