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손지윤기자 unoni031@snu.kr

이런 제목으로 시작하니 학번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지만, 지난주 소녀시대의 ‘사실상 해체’는 내게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내가 캠퍼스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는 9명의 각기 매력있는 소녀들이 메가히트를 친 직후였다. 신입생 환영회의 장기자랑에 ‘Gee’가 빠지지 않았고, 끼 넘치는 선배를 앞세워 동기들과 개다리 춤을 췄던 기억이 생생하다. 옛날이었으면 촌스럽다고 했을 스키니진을 소녀시대 무대를 보다가 장만했고, 친구들과의 점심 테이블에 ‘소녀시대의 누가 예쁘니, 누가 잘하니’가 반찬으로 올라왔다. ‘9명 중 이상형 하나는 있겠지’를 노리고 나온 그룹이다 보니 소개팅 주선 참고서로도 유용했다. 소녀시대는 부모님이 유일하게 아시는 걸그룹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녀들을 입고, 춤추고, 보고, 듣고, 이야기하며 삶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10년 전보다 치열하고 철저하게 상업화된 아이돌 시장에서 모두 뭉쳐있는 것이 그녀들에게도 실질적 이득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이다. 캠퍼스엔 더는 소녀시대식 스키니진만이 유행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게 세상의 순리라고 하지만, 나의 존재 한 페이지가 뭉텅 도려내져 사라지는 것처럼 휑하다. 소녀시대에 얽힌 이야기들은 내가 만날 누군가와의 이야기 소재로는 고루한 페이지가 될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고로, 그 기억을 누군가와 나누기보다 혼자 되새김질하는 순간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2015)에 묘사된 장기기억 도서관처럼, 이제 소녀시대는 기억 저장소에 꽃힌 책 한 권이다. 저장소에 꽂힌 책들은 드물게 한 번씩 꺼내보는 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뿌연 먼지에 파묻혀 어디에 꽂혔는지 존재의 흔적조차 사라지는 순리를 또 밟을 것이다.

소녀시대를 기억 도서관에 잠시 꽂혔다가 잊혀질 책으로 칭하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소녀시대를 나의 무의식에 ‘각인’되고 ‘저장’되는 정보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아차리게 된다. 스키니진을 입고 군무를 추는 소녀시대, ‘소녀시대’를 부르는 소녀시대, 테이블 위에서 오고간 소녀시대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흄은 우리가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존하는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진정한 당신이 있습니까?’(Is there a real you)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대중에게 던지기도 했다. 경험들과 달리 나에게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비밀스러운 자아가 정말로 존재하냐는,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냐는 것이다. 흄과 바지니는 나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소녀시대를 경험했고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당신이 그것을 경험했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그것이 필연적으로 각인돼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소녀시대의 사라짐’이 ‘나의 존재 일부의 사라짐’처럼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보의 기억이야말로 나의 현재를 잘 설명하고 나에게 일관된 서사를 부여하며,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기억은 놓기에 아쉽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이 없는 건 세상의 순리야’라는 존재의 영속성에 반하는 명제를 아프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흄과 바지니의 말대로 내가 ‘진정한 자아’를 설명할 수 없이 소녀시대 경험들이 뒤섞인 집합체라면 조금은 기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일까. 바지니는 본질적 자아가 없다고 해 그것이 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내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식한다해도 그가 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녀시대는 사라져도 내가 소녀시대에 부여했던, 그리고 앞으로 부여할 의미와 감정은 그래도 여전히 매 순간 나의 선택, 나의 몫이다. ‘그래서’ 소녀시대는 굳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빈나 간사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