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글 표기안의 외국 진출 현황과 과제

2015년 한글날, 서울대 아이마라어 연구단이 아이마라어 한글 표기안을 완성해 발표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아이마라어는 볼리비아 헌법에 명시된 37개 공용어 중 하나로 2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다. 사람들은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사례라며 열광했다. 그러나 2년여가 지난 지금 이 사업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언론의 후속 보도도 없다시피 하다. 6년 전 찌아찌아어에 한글 표기법이 도입됐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한글, 남미의 문을 두드리다

김홍락 전 볼리비아 대사는 주말마다 아이마라족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다가 아이마라어를 한글로 표기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때마침 아이마라족 사회 내에서는 스페인어권 문화 기반의 식민 잔재를 극복하고자 로마자 대신 새로운 표기법을 고안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권재일 교수(언어학과)는 “아이마라어는 한국어와 계통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지만 유형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권 교수가 단장을 맡은 서울대 아이마라어 연구단은 2012년 7월부터 3년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볼리비아를 직접 방문해 아이마라어 4개 지역 방언의 음운, 어휘 및 문법 구조를 조사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도 했다.

연구보고서에는 복수의 표기안을 실어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글을 쓰는 방식에서부터 연구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아이마라어는 한 번에 최대 7개의 자음이 연달아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이승재 교수(언어학과) 등은 원어의 발음을 제대로 살리는 풀어쓰기를 주장했다. 반면 박한상 교수(홍익대 영어교육과)는 현행 한글 자형과 동일한 모아쓰기를 지지했다. 박 교수는 “현재 한글의 사용에 초점을 맞추면 모아쓰기를 해야 한다”며 “모음과 모음 사이에 자음 연쇄가 오는 경우 모음 ‘ㅡ’를 삽입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 어두에 둘 이상의 자음이 올 경우 ‘ㅡ’를 넣어 써주는 것과 같은 원리다. 박 교수는 “풀어쓰기는 한글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포기한 것”이라며 “한글이라는 글자를 쓰는 순간 그것과 관련된 정신까지도 심도 있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글 표기안을 개발할 때 해당 언어에 적합한 여러 가지를 제안하되 채택 여부는 해당 언어 화자가 직접 사용한 후에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박한상 교수는 “한글 표기안이 완벽한 문자로서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 “현재 한글 체계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현지인들이 직접 판단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권재일 교수도 “한글을 보급할 때 문화 침략이라는 오해를 주면 안 된다”며 “그 나라의 우수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신조를 밝혔다. 이에 걸맞게 아이마라어 연구단은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주볼리비아 한국대사관과 협력해 아이마라 문화 현상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를 병행했다. 아이마라어 화자가 모바일 환경에서 한글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아이마라어-한글 입력기를 만들어 보급을 시도하기도 했다. 민간 차원에서 적절한 표기안을 만들어 제공했지만 접촉은 조심스러웠다. 6년 전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동력 탓에 후속 사업은 부진했다. 현지에 머물며 한글을 가르치고 퍼트릴 인력이 없었던 점이 주요한 문제였다. 주볼리비아 한국대사관에 현지 상황을 물어봤지만 “현재는 따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찌아찌아족이 모여 사는 마을의 각종 표지판은 이처럼 한글과 로마자를 병기한다. /l/을 ‘을ㄹ’, /w(v)/를 순경음 ‘ᄫ’으로 써서 현대 한국어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인도네시아 현지에 거주하는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 한글로 쓰인 표지판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나 상당수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낡은 상태라고 한다. (사진 출처: pinterest.com)

찌아찌아어를 표기할 때 사용되는 한글과 그에 대응하는 국제응성기호를 함께 적은 자료다. 성문파열음과 연구개비음은 찌아찌아어에서 별개의 음소로 취급됨에도 같은 문자 ‘ㅇ’로 나타냈다. 또 현대 한국어에서 ㄷ, ㅌ과 ㄸ이 각각 유성, 무성과 유기유성파열음으로 삼중대립을 이루듯 찌아찌아어에서도 유성, 무성과 내파음이 삼중대립을 이루고 있어 일대일대응을 시킨 모습이 눈에 띈다. (사진 출처: pinterest.com)

뼈아픈 실패가 남긴 교훈

2009년 8월,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중 하나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됐다. 이름도 생소한 민족이 한글을 사용해 자국어를 표기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글을 매개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언론은 물론이고 교과서에도 한글이 우수하다는 증거로 찌아찌아어를 내세웠다. 2년가량이 흐르자 전혀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한글은 찌아찌아어의 공식 문자가 아니며 한글과 한국어를 보급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던 사람들도 모두 철수했다는 것이다. 2012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는 고등학교 국어(상) 1권과 국어(하) 4권에 쓰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 및 보급했다” “문자가 없어 소멸할 위기에 처한 찌아찌아어” 등의 표현이 잘못됐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찌아찌아어 한글 표기안이 채택될 수 없었던 데는 학문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박한상 교수는 “소리가 같으면 대응하기 쉽지만 소리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문자 목록을 만들 때 한국어에 없는 음소까지도 한글과 최대한 일대일대응을 시키는데 이 과정이 음성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고 덧붙였다.

찌아찌아어에는 현재 쓰이는 한글 자음 24자와 대응되지 않는 소리들이 있다. 권재일 교수는 “한글 표기안을 만들려면 그 언어의 소리를 현행 한글 자모음자만으로 표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영어의 f, v, l, r 같은 자음이 있을 경우 한글 보급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찌아찌아어는 영어처럼 /r/과 /l/을 구분하는 언어다. 따라서 찌아찌아어 화자는 두 소리를 별개의 소리로 인식한다. 그러나 한국어 화자는 이 두 소리를 뭉뚱그려 /ㄹ/로 인식하고 표기한다. 한글 표기안 보급을 주도했던 훈민정음학회에서는 /r/은 ‘ㄹ’, /l/은 ‘ᄙ’로 구별했다. 하지만 ‘ᄙ’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글씨라 전산 입력이 어려웠다. 결국 현행 한글 맞춤법 규정을 고려해 ‘ㄹㄹ’로 표기하는 방식이 고안됐다. ‘lima’를 ‘을리마’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옛 한글을 참고하기도 했다. 찌아찌아어 화자는 유성 순치 마찰음 [v]를 개별 음소로 인식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음소목록에는 /v/가 없다. 이 소리에 대응하는 문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는 ‘ᄙ’과 ‘ㅸ’을 모아쓰자 문제가 드러났다. 컴퓨터에 입력할 때 ‘ᄙㅣ’ ‘ㅸㅣ’처럼 자모음이 제대로 조합되지 않아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 ‘ㅗ’ 같이 자음 아래에 위치하는 모음과 썼을 때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모아쓰기가 불가능해지는 문제도 생겼다.

설상가상 대외상황도 좋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700여 민족과 언어가 공존하는 국가로 건국이념에서부터 ‘통일 인도네시아’를 지향한다. 2009년 헌법에 인도네시아어 사용을 의무화하기도 했다. 전태현 교수(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통번역학과)는 2010년 발표한 논문 「인도네시아의 언어정책-찌아찌아어 한글 표기 문제와 관련하여-」에서 “찌아찌아어에 관한 언어학적 연구 및 기술이 일부 시도된 적이 있으나 찌아찌아어는 2009년 7월 이전까지 문자언어로서의 체계적인 맞춤법을 갖춘 언어가 아니었다”며 이호영 교수(언어학과) 등이 펴낸 찌아찌아어 한글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 1』이 최초의 찌아찌아어 교과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일부 현지 초등학생들은 이 교재로 찌아찌아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인도네시아 국내 여론이 악화됐다. 2010년 11월, 인도네시아 언어진흥부 차장 수기요노 시누타마 박사는 로마자 외에 다른 문자 체계를 들여오는 것이 중앙 정부의 언어정책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위법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와 훈민정음학회 등이 한글 사용을 대가로 찌아찌아족과 맺은 개발 및 원조 협정 상당수가 축소 혹은 백지화됐다. 결국 2011년 이후 훈민정음학회와 찌아찌아족의 관계는 단절됐다. 정부 주도의 한국어 교육 기관 세종학당도 철수했고 민간 차원의 한국어 교육만이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한글’이라는 씨앗이 뿌리내리려면

세계의 다양한 언어에 한글 표기안을 보급하려는 시도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다. 권재일 교수는 “한글은 배우기 쉽도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창제됐다”며 한글을 무문자 언어의 표기수단으로 제공함으로써 세종대왕의 뜻을 전 세계에 펼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성조를 표시해줘야 하는 중국어의 예를 들어 한글이 모든 언어에 적합한 문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어의 음운 체계가 한글 자모 범위 안에 있다면 한글이 표기법으로 다른 어떤 문자보다도 훌륭하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만능 문자는 아니다. 박한상 교수는 한글의 우수성을 긍정하면서도 “문자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언어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글을 보급하려는 시도가 문화제국주의에 입각한 발상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언어적 특성에 부합하지도 않는 한글을 오로지 우수하다는 이유만으로 소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찌아찌아족 사례의 경우는 사회통합을 중시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표기 수단을 로마자로 통일할 것을 헌법에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한글 표기법 보급에 있어 타국의 문화적 배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한국 언론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며 과장된 서술을 일삼은 탓에 자칫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뻔했다.

한 언어를 어떤 문자로 표기할 것인지는 한 번 정해지면 쉽게 바뀌기 어렵다. 사회 전체의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1930년대 스탈린은 극동지방 소수민족을 포함한 연방 내 모든 언어들을 키릴문자로 표기하도록 조치했다. 러시아어에 없는 음운들을 가진 언어들도 음성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어색한 키릴문자를 부여받았다. 국가어인 러시아어가 강조되고 개별 민족어는 외면당하며 힘을 잃었다. 독립 이후 로마자로 표기 방식을 바꾸는 언어들이 여럿 등장했고, 올해는 카자흐어의 표기 방식이 로마자로 바뀌게 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 카자흐스탄에서 로마자 표기를 지지하는 여론이 꾸준히 힘을 얻었지만, 이 작업이 끝나려면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시행하는데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 예측되는 것이다.

박한상 교수는 한글 표기안 전파를 씨 뿌리기에 비유했다. 전 지구상에서 4000여 개 이상의 언어가 쓰이고 있지만,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의 수는 50개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교수는 그중 점유율이 높은 로마자, 키릴 문자, 아랍 문자 등이 “문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은 찌아찌아어와 아이마라어를 매개로 로마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박 교수는 이를 두고 “한글이 받아들여지기 어렵겠지만 일단은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자가 없는 나라나 민족에 한글이 여러 대안 중 하나로 참여한다면 “한글이 문자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안이자 권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반도에서 한글이 널리 쓰이는 데도 거의 500년이 걸렸다”며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한글을 퍼트리면서 학술적인 성과를 쌓아나갈 것을 강조했다. 찌아찌아어 한글 표기안을 개발한 연구자들은 문자가 없는 언어에 한글 표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언어제국주의에 맞서 절멸 위기의 소수 언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씨를 뿌리고 싹이 틀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지 못한다면 또 다른 문화제국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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