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음유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김광석. 그가 요절한 탓도 있지만 ‘김광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코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대중음악의 판도가 댄스 음악으로 옮겨 가던 시기에 1970년대 포크 음악을 리메이크 해 ‘다시 부르기’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는 상실한 대상인 ‘너’를 결코 잊지 못해 밤을 새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의 노래들에는 망각과 기억의 경계에 선 자의 과거를 향한 몸부림이 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잊혀 가는 것들을 소환하며 애도의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애도의 대상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노래들로 엮은 뮤지컬이 붐을 일으키고,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조성되는 등 김광석 신드롬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는 문화적 재현을 매개로 한 집단적 애도인, ‘문화적 애도’에 해당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아마도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일은 그의 죽음을 가시화하고,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응답하는 ‘애도’와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는 음악 외적인 부분들에 초점이 집중되는 것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있다.

이처럼 그는 생전에 사랑받았던 만큼이나 오랫동안 추모돼 왔지만 그에 대한 애도는 왜 그런지 여전히 모자란 느낌이다. 이것은 어쩌면 애도의 본질에서 비롯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가령, 자크 데리다는 애도는 성급하게 완수될 수 없는, 즉 영원히 끝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망각에서 기억으로의 끊임없는 행위가 애도의 본질이라고 할 때, 이러한 시점에서 그의 노래를 다시금 음미하는 것도 애도의 한 방식일 것이다.

나는 김광석과 세대적으로는 거리가 있지만, 서른 즈음의 나이에 이르니 마치 통과의례처럼 ‘서른 즈음에’ 가사를 되새겨 보게 된다. 나를 포함해 청춘들이라면 청춘의 방황을 노래한 김광석에게 얼마간의 부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 신문에서는 이 노래를 20대의 희망과 기대, 가능성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답답함 때문에 조울증에 빠진 30대 ‘중년’들에게 바치는 것이라 설명했다.(「경향신문」1995년 5월 20일자) 이 기사를 읽고 나니 30대를 ‘중년’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반감과 함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상 이제는 학부생, 대학원생에게도 ‘서른’이 먼 일이 아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기대하기 힘든 요즘이다. 더구나 취업에 있어 졸업 시점이 중요한 ‘스펙’이 돼버리면서 졸업을 최대한 유예하는 것이 다반사다. 몇 년 동안 고시와 공무원 시험, 취업 준비를 하다보면 어느새 ‘서른’이 바로 코앞으로 닥쳐온다. 1994년과 오늘날 ‘서른 즈음’의 청춘들이 체감하는 ‘서른’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준비를 못한 채 서른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 이들이 겪을 법한 마음의 흔들림을 이 노래는 담담하게 표현해준다. 여기에 요즘의 청춘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의 결이 있다. 드라마 <미생>에서 직장을 나온 장그래가 부른 ‘서른 즈음에’는 쓸쓸하지만, 그래서 더 위로가 된다. 긴 여운을 남기는 이 노래는 적어도 흔한 위로를 가장하거나 손쉬운 해결을 내세우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가 남긴 노랫말의 한 구절처럼, 그가 떠난 ‘텅 빈 방 안에’는 아직도 그의 ‘향기’가 가득하다.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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