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ㅣ한국수화언어법 제정 및 시행 1주년을 돌아보다

27만 농인들의 숙원이었던 한국수화언어법(약칭 한국수어법)이 2016년 8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로써 ‘한국 수어’는 법적으로 한국어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별개의 언어가 됐다. 한국 농인들은 2005년경부터 △농학교에 수화를 구사하는 교원을 충원할 것 △방송 및 영화에 수화 혹은 자막 방송을 제공할 것 △농인의 1종 보통 운전면허 취득을 허용할 것 등을 골자로 청각·언어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꾸준히 개최해왔다. 2008년부터는 각계 인사들이 힘을 합쳐 ‘한국수화언어기본법’ 초안을 작성했다. 2010년 4월 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 ‘수화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수화언어기본법 초안은 국회를 표류하다 폐기되고 말았다. 소관 부처 및 예산과 관련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쓴맛을 봤지만, 농인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그러던 중 ‘수화기본법 제정’을 장애인 복지 관련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던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한국수화기본법 제정 운동도 탄력을 받았다. 2013년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수화와 관련된 법안 4개가 발의됐다. 하지만 서로 다른 법안을 합치는 것부터 난항이었다. 더딘 진행속도 때문에 2015년 11월 장애인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박근혜 정부 장애인 공약 이행 중간평가’에서 ‘한국수화언어기본법 제정’이 세 번째로 낮은 만족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끈질긴 요구는 2016년 2월 한국수어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이 달콤하게 무르익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수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이 법은 한국수화언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한국수화언어의 발전 및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여 농인과 한국수화언어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수어법이 왜 제정됐는지 설명하는 제1장 제1조(목적)에서는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동등하나 별개의 언어임을 분명히 한다. 관악구수화통역센터에서 수어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이미연 과장은 “농인은 단순 청각장애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라며 듣지 못한다는 건 농인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농인들은 수어를 통해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기 때문에 이는 사회문화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농인들의 모어인 한국수어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농인의 언어권 및 정체성 문제와 직결된다. 국어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된 ‘국어기본법’이 이미 존재함에도 농사회에서 한국수어법을 제정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어를 구어의 보조수단으로 여겨 농인과 필담으로 온전히 소통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하는 청인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연 씨는 “농인들의 모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수어”라며 두 언어를 별개의 독립된 언어라고 설명했다. 청인들은 보통 문자를 보면 이를 머릿속에서 소리를 내 읽곤 한다. 청인의 언어는 음성을 매개로 하는 음성언어기 때문이다. 반면 수어는 손의 움직임과 표정 등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시각언어다. 이 씨는 한국수어를 외국어 혹은 소수민족 언어에 빗대 한국수어가 모어인 농인에게는 한국어가 외국어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수어는 구어를 손짓으로 치환한 것이 아니다. 수어는 제 나름의 독자적인 통사구조와 문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똑같이 한국에서 쓰인다 하더라도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문법은 판이하다.

전 세계적으로 언어학계에서 수어가 연구대상이 된 지는 7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미국의 언어학자 윌리엄 스토키가 1960년 발표한 「수화의 구조: 미국 농인의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개요」(Sign Language Structure: An Outline of the Visual Communication Systems of the American Deaf)는 현대 수화언어학의 출발점이다. 스토키는 이 논문에서 ‘수화 음운론’의 개념을 창시했다. 이후 시각언어로서 수어가 가지는 특성에 대한 후속 연구가 연이어 나오면서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 등 이론언어학 분야는 물론 코퍼스언어학, 정보처리나 언어습득 같은 응용언어학 분야까지 수어에 관한 폭넓은 연구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음성언어 사용자들이 실어증을 겪듯이 뇌의 언어중추에 손상을 입은 농인이 수화실어증을 겪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이는 수어 역시 뇌 내 언어중추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입증한다.

농인들의 투쟁, 결실을 맺다

2006년 4월 10일 뉴질랜드에서 수어를 자국 농인의 모어로 규정하는 ‘뉴질랜드 수어 법안’(New Zealand Sign Language Bill)이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 헝가리 의회에서도 2009년 11월 ‘헝가리 수어와 수어사용에 관한 법률안’(A Magyar Jelnyelvről és a Magyar Jelnyelv Használatáról Szóló Törvényjavaslat)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외에도 핀란드, 체코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어와 관련한 법을 제정하고 농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2016년, 드디어 한국도 수어의 지위를 별도의 법으로 보장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수어법 제2조는 한국수어가 대한민국 농인의 공용어임을 천명한다.

최상배 교수(공주대 특수교육과)는 “수어가 자연 언어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농인의 공용어임을 법에서 최초로 규정했다는 점이 한국수어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수어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국어기본법’과 ‘장애인복지법’에는 수어와 관련된 조항이 존재했다. 국어기본법 제6조의3 제9항은 국어발전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되 “정신·신체 상의 장애에 의해 언어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 및 국내 거주 외국인의 국어사용 상의 불편 해소에 관한 사항”을 고려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22조와 제23조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폐쇄자막 또는 수화통역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수어를 보조수단으로 취급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농인들은 자신들의 언어권을 오롯하게 보장받기 위해 한국수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최 교수는 “뉴질랜드 수어법에서는 뉴질랜드 수어를 뉴질랜드의 공용어라고 규정하고 있다”며 “한국 수어가 대한민국의 공용어가 아니라 대한민국 농인의 공용어라고 규정한 점은 아쉽긴 하지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수화통역사 이미연 씨도 “한국수어법 제정은 농인들은 물론이고 수화통역사들에게도 큰 기쁨”이라며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인정됨으로써 농인들은 농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 씨는 “한국수어법이 정착하기까지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면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수화통역사로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수어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나아지는 것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이 씨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수어를 낯설게 받아들였다면 요즘은 ‘누군가 저 언어가 필요하구나’라고 느끼는 것을 보니 10~15년 전보다 인식이 괜찮아졌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서 근무하며 수어를 배운 경험이 있는 조기남 씨(51)도 “앞으로 청각장애인들의 언어권과 인권이 보장되고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 본다”고 밝혔다.

한국수어법이 남긴 아쉬움

2016년, 방치 상태던 ‘국립국어원 한국수화사전’ 홈페이지가 ‘한국수어사전’으로 탈바꿈했다. 법률, 의료 등 전문분야 수어와 각종 박물관의 문화정보 수어를 비롯한 표제어가 보강됐고 수형별 검색 기능이 생겼다. 하지만 이 외에는 아직 한국수어법의 영향력을 체감하기 어렵다. 한국수어법이 시행된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최상배 교수는 “농인들은 한국수어법 시행으로 수어에 대한 자존심을 가지게 됐으나 실제 현장은 바뀐 것이 없다”며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수어에 대한 인식 개선과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수어법이 작년에 제정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법의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수어법의 수혜자가 돼야 할 농인도 예외는 아니다. 경북 울진에 거주하는 농인 권순연 씨(52)는 “한국수어법이 시행됐을 때 감동을 받았다”면서도 “한국수어법에 대해 사실 잘 모른다”고 말했다. 권 씨는 “시행 이후 생활에 달라진 부분은 전혀 없다”며 “홍보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연 씨도 “구별로 수화통역센터가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지자체마다 사정이 달라 시행하는 데 시차가 있다”며 아직은 제도가 정착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내용 면에서도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에이블뉴스’ ‘함께걸음’ 등 장애인 언론은 한국수어법의 내용이 대체로 한국수어의 언어적 특성 및 교육 문제에 치우쳐 있어 농인의 사회적 권리를 향상하는 데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최상배 교수도 “한국수어법은 수어를 규정하고 수어 발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수어를 교육하는 방법에 초점을 둔다”고 평하며 “아직 초기 단계니 우선순위를 정해서 착실히 시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일본은 별도의 수어 관련법이 없지만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 때는 항상 수어통역 서비스가 제공된다”며 중요한 것은 수어통역사를 증원하고 수어통역 서비스를 의무화하는 등의 실질적인 도움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별도의 법까지 제정했음에도 실효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미연 씨는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수어통역이 꼭 붙어야 하는데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며 수어통역사들이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정작 법률, 의료 등의 전문 분야에서 각자의 전문성을 키우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일손이 부족해 적은 수의 수어통역사들이 각자 넓고 얕은 지식을 가지고 여러 분야에 걸쳐 활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상생을 꿈꾸며

한국수어법이 제정되면서 한국수어는 한국 내 27만 농인들의 모어라는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홍콩에서는 수어와 구어 간 이중 언어교육과 통합교육이 모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2016년 국립국어원과 한국농아인협회가 개최한 ‘수화언어와 사회적 소통’ 학술대회에서 필릭스 시 교수(홍콩 중문대학교)는 농인과 청인이 한 학급에서 생활하며 농인은 구어를, 청인은 수어를 익힘으로써 학생들이 긍정적인 자아 개념을 형성하게 됐다는 연구 사례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농교육계에서조차 수어를 구어의 보조수단으로 인식했다. 농학교에서는 어순과 통사구조를 한국어와 일대일로 대응시킨 이른바 ‘문법식 수화’를 ‘표준 수화’라는 이름으로 가르쳤다. 최상배 교수는 “홍콩의 성공 사례는 농교육에서 수어의 가치를 수용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도 대안학교에서 시범적으로 수어 이중언어 교육을 하고 모범사례를 전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언젠간 한국 교실에서도 농인과 청인이 한 학급에서 생활하며 농인은 한국어를, 청인은 한국수어를 배우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진정한 상생일 것이다.

삽화: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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