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영 선임행정관
중앙도서관

지난 2015년 6월, 미국도서관협회(ALA) 연차 총회에 참석했던 필자는 인상적인 한 장면과 조우했다. 그것은 ‘People First Award’라는 시상식으로, 이름 그대로 ‘사람을 최우선으로’ 배려함으로써 공동체에 기여한 도서관에 수여되는 상이었다. 이 상은 그해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소재 ‘애녹 프랫 공공도서관’에 돌아갔다. 수상 배경은 동년 4월 경찰 구금 중 사망한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폭동과 비상사태 속에서도 지역 주민들의 피신처로서 도서관을 개방하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진 사서들의 용기와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다. 수상 소감을 통해 피력한 헤이든 관장의 확고한 소신은 아직껏 기억에 새롭다. “이번 경험은 도서관이 지향해야 할 목적과 내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가상 도서관의 시대를 논하는 이때에 ‘장소로서의 도서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 도서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는다. 즉 일종의 사회 안전망으로서 신체적, 정신적 쉼터이자 동시에 책이라는 인류 문명사를 관통하며 시대의 변화에 늘 열린 공간으로서 지적 창조와 상상력의 터전을 제공해왔다. 이를 들어 혹자는 『자본론』을 완성한 것은 마르크스가 살다시피 한 대영박물관도서관이라고 하던가. 같은 맥락에서 서울대인 각자는 인생의 한 시기를 오롯이 함께했던 장소로서 중앙도서관 곧 ‘중도’와 어떠한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7~8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중도는 아크로폴리스를 가득 메운 젊은이들의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망과 함성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모진 시대에 맞서 이곳에서 꽃잎처럼 목숨을 떨군 두 젊은이(김태훈, 황정하)의 넋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러고 보면 아크로폴리스와 더불어 중도 건물에 대한 서울대인들의 남다른 애착은 이곳에 켜켜이 쌓인 개인적, 시대적 서사 때문일는지.

70년대 초 관악캠퍼스 종합화와 맞물려 미국 캠퍼스 계획 설계회사(DPUA)의 제임스 패독이 설계하고, 1974년 12월 말 내장 공사까지 모두 마친 중도는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의 도서관으로 이만갑 관장 등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이의 땀과 헌신의 소산이었다. ‘새 캠퍼스 새 풍물’로 등장한 중도 터널까지도. 뒤이어 동숭동 옛 도서관에서 신축 도서관으로의 이전 작업 또한 그야말로 대역사였음은 당시의 대학신문이 전하는 바다. 마침내 정들었던 옛 캠퍼스를 떠나면서 벌인 문리대의 고별식 굿판에서 학생들은 이런 주문을 외었다던가. “문리대 귀신 따라와라, 도서관 귀신 따라와라.”

그로부터 어언 40여 년 남짓한 세월의 풍상을 견뎌낸 중도는 이제 서서히 리모델링으로 새 단장하려 한다. 서울대 학문 지식의 전당으로 진력해온 지난 세월만큼, 퇴락한 중도의 외관은 건물의 안전성마저도 의심케 하는 실정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만성 서고 포화 증후군’과 그로 인한 서고들의 난맥상은 흡사 지식 질서의 카오스 상태에 견줄 만하다. 때문에 중도의 리모델링은 말쑥해진 외관과 이용자 친화적인 공간 구성은 물론, 나아가 서울대인의 감성과 역사적 기억까지 담아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리모델링의 본격 가동까지 갈 길은 지난하나, 그럼에도 앞길을 재촉하는 힘은 서울대인들의 남다른 도서관 사랑이다. 일례로 국내 1세대 국어·국문학자들이 일생을 통해 모으고 지켜낸 개인장서들을 기꺼이 기증했기에 오늘날 도서관 장서의 보고로서 일사, 가람, 일석 문고 등이 존재하듯이. 바라건대 부디 많은 서울대인의 관심과 참여 속에 중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이 공존하는 우리 모두의 중도로 거듭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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