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아
연구원한국정치연구소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The Semisovereign People)(1960)에서 민주주의를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로 상정한다. 일반적으로 갈등은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서로간의 반목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사회 내에 다양한 이익과 가치가 존재하는 한 갈등은 필연적이며 갈등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광범위한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 중 어떤 갈등이 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며 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로 전환된다. 따라서 복합적인 갈등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익을 집약하고,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익과 가치에 부합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제시하는 정당은 대의민주주의에서 핵심적인 기구가 된다. 요컨대,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를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로 정의한다. 정당들이 제시하는 대안이 비경쟁적이거나 유권자의 이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유권자의 주권은 절반에 그치게 된다.

지난 30년간의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경쟁을 특징으로 한다. 지역주의가 지배적 갈등으로 기능하는 동안 이념, 세대, 계급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다양한 이익은 정당정치에 반영되지 못했다. 이렇게 기존의 갈등구조가 지역주의로 일원화됐던 것은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정당들의 동원전략에 의해 다른 갈등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거나 혹은 억제됐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적 경쟁 구도 하에서 유권자들은 절반뿐인 주권을 행사하는 데 그쳤다. 이는 민주주의를 갈등의 공적 해결과 정치 공동체의 운영이라는 문제라기보다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등한 문제로 이해해 온 경향이 강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한편 최근 3김의 퇴진, 세대교체, 그리고 세계화 등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지역구도의 약화 혹은 그 속성의 변화가 목도되며, 이념갈등 및 세대갈등 등 사회 내 다양한 갈등이 부상하고 있다. 이에 정당들은 유권자의 동원과 생존을 위해 지역주의에만 기댈 수 없는 정치적 환경에 놓이게 됐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 시민에게 주어진 절반의 주권은 어떠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셰보르스키에 의하면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세력들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하는데, 이러한 이익의 실현 여부를 경쟁의 결과의 불확실성에 맡기는 것, 즉 ‘불확실성을 제도화’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또한 헌팅턴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지표로 두 차례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요컨대, 이들이 말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는 경쟁의 결과를 담보할 수 없는 정치체제이며 이는 결국 정치를 바라보고 이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득표와 집권, 나아가 정당의 존립이 더 이상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당으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특정 지역에서의 독점적인 지지를 통해 생존했던 정당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구현하고 도덕성을 강화할 인센티브를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활성화돼 있고 깨어 있는 유권자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후진적인 정치가 자리할 공간이 없다. 따라서 시민이 갖는 절반의 주권은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선택하는 ‘절반뿐인’ 주권이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정치사회와 ‘절반씩’ 주권을 공유하며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통해 정당으로 하여금 자정 노력과 근원적 혁신을 하게 만드는 건설적인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개념화돼야 할 것이다. 절반의 주권을 능동적으로 행사하는 유권자들의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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